무의미함의 색깔

좋아하는 것들을 더듬다 보니 결국은 무의미함의 색이 아니었나.

by 초록숨


초등학교 때 나는 베이지 색 옷을 참 좋아했다. 베이지 색 잠바, 베이지 바지, 베이지 조끼. 내가 가진 옷 중에서 매일 여러 조합으로 옷을 입고 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같은 반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너는 왜 맨날 같은 옷만 입어?” 그 충격이 엄청났다. “응? 아닌데...” 소심했던 나는 별다른 말도 못하고 집에 와서 이제부터는 아주 다른 옷들로 입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항상 다양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비슷한 것들의 중첩일 뿐이었을까?


사람은 얼마나 바뀌지 않는 것인지, 요즘도 다양한 일을 마음가는 대로 했을 뿐인데 이상하게 비슷한 것들이 자꾸 끌려온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요가를 하며 만난 처음 뵙는 분들과 우연한 기회로 필사 모임을 하게 되고, 그 필사 모임을 위해 최근 내가 고른 책이 <편안함의 습격>이었다. 현대 사회에 찾아온 편안함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책이겠거니 하고 편안하게 고른 책인데, 이상하게 읽으면서 또 요가와 결이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편안함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비집중 모드로 있는 것이 요가의 알아차림과 비슷한 상태라고.


지독한 집순이인 나는 집에 있으면 시간이 너무나 빠르게 흐른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 취미를 TV보기라고 당당하게 적을 만큼 나는 소파에 누워 티비만 볼 수 있으면 금세 행복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와 함께 놀이터를 가거나, 캠핑을 가는 것도 아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서 고생하는 것쯤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이 책에서 ‘자연 속에서는 좋은 것들을 받아들이며 그것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게 된다’는 말을 읽으니 간사하게도 산책하는 것이 갑자기 또 멋있는 행위로 느껴졌다. 귀찮고 싫지만 건강을 위해 해야하는 일이 아니라, 마치 요가를 하고 있는 내가 조금은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처럼. 자연과 함께 하는 일이, 산책이 얼마나 좋은지는 당연히 상식으로 알고 있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과 고리를 엮으니 정말 내게 딱 필요한 행동으로 의미부여가 되었다. 인식을 전환한다는 것이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대상에 대해 좋은 점을 인식한다의 수준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느낌을 처음 받아봤다. 편안함을 사랑하던 내가 요가를 하고 싶어졌던 것부터 필사 모임과 이 책에 이르기까지, 누군가가 자꾸 이것도 비슷한데 어때? 하고 고리를 지어주는 것 같았다.


<편안함의 습격>과 결이 비슷했다고 생각한 프로그램들이 있다. 옥자연 배우가 나혼자 산다에 나와서 힘들게 짐을 지고 올라가 캠핑을 하는 편이었는데, 그 분이 인터뷰 중에 이런 일들이 얼마나 의미가 있겠냐고, 그렇지만 그런 의미없는 일들을 내가 하겠다고 결정해서 해낼 때의 성취감이 있다고 말했다. 조용히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만큼 어떤 성취감을 느끼기 어려운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나 역시 삶에서 얻어지는 조각조각의 생각들을 얼기설기 꿰매어 가는 것은 그것을 한 편의 글로 엮어서 올렸을 때의 성취감이 좋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극한 84에서 기안84님은 ‘출발할 때의 나와 6시간 후 도착점으로 돌아온 나는 달랐다’고 말한다. 한계를 넘는다는 건 내 생각의 모양새를 바꾸는 일인 것 같다고. 북극 마라톤을 마치고 ’25만년의 빙하 앞에 서니 100년 밖에 못사는 하루살이가 된 느낌이라고, 달리기는 나를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권화운님도 힘들지만 달릴 때의 살아있음과 감사함이 좋다고 인터뷰했다. ‘살아있음과 감사함‘ 결국 자연 속에서 얻어야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것들은 편안함 속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한계를 넘은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들. 그 결연하고 깨끗한 마음. 인간은 결국 불편함을 통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직면할 때 비로소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나는 무엇에 대해 쓰고 싶은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에 대한 막연한 생각들을 가지고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내가 끌어당기는 이 모든 것들이 보여주고 있었다. 요가를 하고, 자연을 충분히 느끼고, 살아있음에 감사할 수 있는 도전들을 많이 하면서, 생각은 줄이고 밖으로 나가 보고 느끼며 나를 알아차리라고.


누군가가 나를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인식하는 것이 싫었지만, 사실 내가 선택하는 옷들은 내가 좋아하는 촉감, 내가 좋아하는 무늬, 내가 좋아하는 이미지였다. 그때의 나로 돌아간다면, “이건 내가 좋아하는 옷이야.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선택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물론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을 삼키는 것도 나의 색이니까. 이제는 보다 당당하게 나와 결이 같은 것들을 잘 움켜쥐며,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들로 나만의 색을 칠해나가야겠다.

작가의 이전글<만약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