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모두가 해답을 원한다
안경을 처음 샀을 때가 떠오른다. 검고 긴 테두리에 며칠 동안 닦지 않아도 투명하고 깨끗한 렌즈.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렌즈는 먼지와 손자국으로 앞이 뿌옇게 보이게 되면서 더러워지고, 우리는 안경닦이로 렌즈를 닦아야 한다. 렌즈를 그렇게 닦고 닦다 보면 어느새 안경은 수명을 다하게 되고, 더 이상 렌즈로 닦아도 안경은 투명하고 깨끗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안경을 바꾸러 갈 때면, 왠지 모르게 설레고 신난다. 그리고 새 안경을 쓰면 다시 세상이 맑고 깨끗해 보인다. <벌새>를 보니 마치 안경의 오르내림은 우리의 세상을 보는 눈과 같다고 생각이 든다. 우리의 유년기, 비유하자면 우리가 안경을 새로 샀을 때에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본다고 할까. 신기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안경이 점점 더러워질수록, 우리는 몸의 일부처럼 너무나도 익숙해진 안경을 그저 쓰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 영화라는 매체의 정직함
한 번도 영화 속에서 우리의 진짜 세상을 가만히, 아프지만 천천히 들여다본 적이 있었나. 물론 그런 시각을 제공해주는 영화들이 정말 많다. 하지만, 보통 영화란 우리에게 즐거움 그리고 재미를 주기 위한 대중적인 매체로 인식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는 극적인 전개가 꼭 하나씩은 필요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 재미보다는 진실, 극적인 전개보다는 사실주의가 필요하다. <벌새>가 그렇다. 마치 상처 난 손가락에 붙인 밴드를 얼마 지나지 않아 떼어 보는 듯 외면하고 싶은 우리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느낌이랄까. <벌새>는 2시간 18분 동안의 정말 양념 하나 없는 미음이다. 우리가 어릴 적 어떻게 세상을 바라 왔는지 ‘은희’라는 인물을 통해 담담하게 제시하고 있다. 알 수 없는 세상의 원리, 그저 신기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이상하고 가끔은 정말 화가 나기도 하는 이 세상. 마치 1초에 아흔 번이나 날갯짓을 하는 벌새처럼, 1초에 세상에 대한 감정이 휘릭 휘릭 바뀌었던 우리의 어린 시절. <벌새>는 각자 내면 속에 하나씩은 존재했던 ‘은희’라는 인물을 천천히 꺼내 준다.
- 배우들의 신선한 마스크
<벌새>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대중적인 배우가 많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를 더욱 몰입하게 할 수 있는 장치 중 하나인데, 박지후 배우 그리고 김새벽 배우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객관성과 진실성을 나타내는 데 정말 적합한 배우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두 배우 모두 아직까지는 많은 대중적인 작품에서 만나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의 담담한 진행을 배우만의 잠재적인 아우라로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지만, 신비롭게 잘 녹아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 주위에 있을 것만 같은 인물들을 사실적으로 잘 연기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딱 적당한 에너지로. 오히려 그래서 더 사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영화도 결국 세상을 보는 하나의 창문이다. 그 기능을 잘할 수 있는 하나의 허구적인 배역보다 정말 우리가 진짜 세상과 어떻게 마주하는 지를 사실적으로 연기하고 관객들을 설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 인지 알기에 더욱 대단해 보였고 좋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 세상에 대한 암묵적 시선
<벌새>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세상에 대한 사람들 내면 속 암묵적인 시선을 세밀하게 전달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아까 글의 시작에서 언급한 안경처럼, 우리는 오래된 안경이 닦아도 닦아도 깨끗해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너무 익숙한 나머지 ‘내 안경이 원래 그런 것이지’ 하며 그대로 그 안경을 쓰며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다.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 할까. 세상에 대해서 느끼는 수많은 감정들을 그저 마음속으로 느끼고 안으로 내지를 뿐, 소리 내지 않는다. 그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개개인의 정해진 일상 속에서 살아갈 뿐이다. 영화 속의 영지의 대사처럼 그 속에서 우리는 느낀다.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들이 넘쳐나기도 하지만, 가끔은 쉽게 풀리는 정답 같은 일들도 많다. 그것을 마음속으로 쥔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그 답은 영화 속의 인물조차 모른다. 아마 대다수의 관객들도 모를 수도 있다. 영화는 그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 ‘세상’이라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벌새>는 마치 파우스트 같은 영화일 것 같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해서 곱씹을수록 다가오는 바가 정말 다를 것이다. 마치 우리 모두의 평생의 세상 교과서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