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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티 Greentea Nov 12. 2019

만지면 차갑지만 바라보면 따뜻한, 영화 <윤희에게>

때론 '그리움'은 우리가 살아갈 '용기'를 준다

겨울은 우리의 내면과 가장 솔직하게 만날 수 있는 계절이다. 봄은 향기로운 꽃들에, 여름은 울창한 나무들에, 가을은 알록달록 물든 단풍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뺏기게 된다. 하지만 ‘겨울’은 다르다. 아무 소리 없이 내려와 차곡차곡 쌓이는 눈과 날카로운 바람은 평소에 우리가 마음속에 가지고만 있었던 외로움과 그리움, 많은 생각들을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꺼낸 다음 다시 짚어준다. <윤희에게>는 이렇게 아프지만 개운한 계절인 ‘겨울’을 다루고 있어서 더욱 깊고 담백하게 마음속으로 다가온 영화이다.

<윤희에게>를 보고 난 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 것은 주인공 윤희가 아닌 ‘눈’이었다. 영화 속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재인 ‘눈’은 영화를 보기 전 싱숭생숭하고 건조한 마음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만들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이 마치 ‘그리움’을 시각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 혹은 사랑은 사실 우리도 모르는 채 마음속으로 불쑥 들어온다. 그리고 소리 없이 마음속을 헤집고 혼란스럽게 한다. 때로는 우리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이 강렬한 감정에 곤란해질 때도 있다. ‘눈’도 마찬가지다. 밤새 소리도 없이 우리 곁에 살포시 내려앉고는, 하얗고 광활한 풍경으로 우리 마음을 놀라게 한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눈은 어느 새인가 모르게 뭉쳐지고 딱딱해져 길을 막아 우리를 곤란하게 하고, 쉽게 처치할 수 없다.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라는 대사에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사랑이나 그리움은 영원히 마음속에서 그치지 않죠, 우리는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으로 버티고 사는걸요.’

또한, 영화 속 중요한 장치는 바로 ‘기차’와 ‘편지’이다. 기차와 편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누군가와 ‘연결’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러 갈 때, 만나고 돌아올 때 그 설레고 아쉬웠던 감정들을 ‘기차’라는 수단 자체에 담는다.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마음을 꼭꼭 담아 전하고 보내는 그 두근거림, 답장을 기다리는 초조함, 답장을 받았을 때의 행복 또한 우체국, 편지지, 편지 세 가지 모두에 담는다. 그 후에 우리 곁으로 어떤 기차가 지나가거나 우연히 어떤 우체국이나 우체통 앞으로 지나갈 때,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그 감정은 다시 폭풍처럼 되살아난다. 다시 말해, 몸이 떨어져 있어도 혹은 기억이 잠시 멈춰있어도, 그 순간을 시작으로 우리는 그 상대방과 길고 긴 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줄은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다. 그 감정의 진실함만큼.

보통 ‘그리움’이라고 하면 슬프고 우울한, 다소 어두운 감정이라고 많이 생각한다. 하지만, <윤희에게>는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그려냈다. 지금은 만날 수 없어도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은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준다. 때로는 그 희망 자체가 꿈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의 마음은 단단해지고, 더 성장하게 된다. 더 이상 ‘그리움’은 어둡고 무서운 감정이 아니다. 내리는 눈처럼, 만지면 차갑지만, 바라보면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정이랄까.

배우 분들의 연기도 잔잔하면서 힘이 있었다. 김희애 배우는 대사가 그렇게 많이 있지 않았지만 눈빛과 행동 하나하나에 묘하고 슬픈 분위기가 스며들어 있다. 윤희가 거리를 걷는 모습만 보아도 괜히 마음이 울컥해지는 것은 그만큼 캐릭터에 대한 고민과 분석이 뛰어났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김소혜 배우와 성유빈 배우만의 순수하고 맑은 연기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또 다른 축이 되었다. 보는 내내 따뜻하고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영화가 끝나고, 윤희뿐만 아니라 새봄이와 경수의 이야기도 너무 궁금했다. 그만큼 좋은 연기였다고 생각했다.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은 배우들이다.

<윤희에게>는 올 한 해를 마무리하기 좋은, 따뜻하고 먹먹해지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사랑뿐만 아니라 가족의 소중함, 겨울의 포근함을 모두 담았기 때문에 연인, 가족, 친구 모두와 함께 보아도 손색없는 겨울 로드무비이다. <기생충>에 이은 올해 가장 좋았던 한국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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