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과 마음이 같은 방향을 향할 때 마침내 완성되는 그림, 사랑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비롯해 2관왕을 수상하고 각종 시상식을 뒤흔든 화제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CGV 컬처데이 쇼케이스로 미리 만나고 왔다. 국내 정식 개봉일은 2020년 1월 16일이니 참고하기를 바란다. 영화제와 프리미어 행사로 먼저 관람을 한 관객분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주어서 개봉 전부터 명성이 아주 자자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대를 안 하고 볼 수 없는 작품이었고 역시 영화는 그 기대를 현실로 바꿔주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화가 마리안느가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의 결혼 초상화 의뢰를 받게 되면서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되고, 그 후에 벌어지는 일을 다룬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요소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바로 '그림'이다. 사실 평소에 '그림'을 그리고 감상하는 행위 자체가 간단하고 명료한 행위라고 생각했었다. 내 앞에 있는 것들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표현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감정이 필요하지도 않고 날카로운 눈만 있으면 정확하게 성립되는 이성적인 행위라고 느꼈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내 생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영화에서 마리안느가 화가로 등장하기 때문에, 당연히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진행이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즉, 바라보는 사람과 그려지는 사람의 구도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데, 영화에서는 이 구도 자체를 여백으로 비워둔다. 아무런 대사와 배경음악이 없는 그 행위 자체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본능적으로 그 여백을 '감정'으로 채우기 시작한다. 서로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고 한 사람은 손으로, 한 사람은 온몸으로 서로를 맞대는 저 두 인물 사이에는 어떤 감정이 피어나고 있을까.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단번에 끓어오르는 그 감정, 그것이 정답이다.
그림을 그리려면 그 모델의 눈, 코, 입부터 귓불의 모양, 아주 조그맣게 삐져나온 머리카락까지 한 사람에 대한 세심한 요소들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모델에 대한 섬세하고 자세한 감정을 가질수록, 더욱더 아름다운 그림이 나온다.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마치 사랑의 체계와 닮아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졌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상대방을 이성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감성의 눈으로 바라보며, 나에게 다가오는 상대방의 모든 느낌들을 마음으로 그린다. 결국, 이 영화는 그림을 다루고 있지만 돌이켜보면 사랑에 관해 다루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영화를 곱씹어보면 마치 부드러운 털을 만지는 것 같다. 감정을 천천히 쓸어 올리고 천천히 내리면서 영화에서 전하고자 하는 감정들을 단번에 한 컷에서 전하지 않는다. 그 감정을 수많은 장면들로 나누어서 천천히 타오르게 한다. 그리고 이내 활활 타오르는 영화 속 감정들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는지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둔다. 이런 영화와 관객의 대화방식도 마치 그림을 보는 방식과 유사하다고 느껴진다.
'그림'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장면을 벗어나 다른 장면에서도, 그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마치 그림 같다. 정말, '그림'을 다루고 있는 영화라서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솔직하게 정말 모든 장면들이 아름답다. 한 장면을 무작위로 골라서 캡처를 해서 이름을 붙여도 어딘가에 위치한 갤러리에 전시가 되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만큼 여러 측면에서 우아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든, 영화를 보고 난 다음 한 가지는 확실할 것이다. 우리의 시선과 마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우리의 눈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속 모든 감정들을 긁어내 비춰준다.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 / P.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