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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티 Greentea Mar 10. 2020

'사랑' 영화가 아닌 진정한 '사람' 영화

때론 말 한 마디보단 재생목록의 한 곡이 더 좋다, 영화 <비긴 어게인>

‘Lost Stars 몰라?’  당시 같은 반 친구가 놀랍다는 듯이 물었었다. 2014년 여름과 가을 사이, 대한민국을 음악과 밤의 거리의 감성으로 젖게 한 영화 <비긴 어게인>은 중학생들마저 ‘Lost Stars’ 속에 등장하는 어린양으로 물들였다. 그 당시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조차 모른 채 그저 화제성에 떠밀려 부랴부랴 친구와 함께 극장으로 갔고, 극장 밖을 나오면서 드는 생각은 ‘아, 사운드트랙이 정말 좋구나, 왜 이렇게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알겠다!’ 정도였다. 가사를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운드트랙을 듣고 있으면 왠지 어른이 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세상사를 전부 안다는 느낌은 덤. 그래서 일부러 재생 목록에 훤히 보이게 올려놨던 것도 생생히 기억난다. 지금 생각하면 다소 부끄러운 감상이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6년이 지났고,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 사태로 2,3월 개봉 예정인 작품들이 족족 뒤로 밀리게 되는 바람에 <비긴 어게인>은 다시 극장에 걸리게 되었다. 중학생, 고등학생 때 개봉했던 작품들이 다시 극장에 걸리게 되면 왠지 묘한 승부욕이 생긴다. 그때의 나의 감상과 비교하여 지금의 나의 감상이 얼마나 성장했고 폭이 넓어졌는지 시험해보고 싶다는 기분이랄까. 그렇게 <비긴 어게인>을 6년 만에 다시 극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진짜 영화의 제목처럼 영화를 다시 시작한 셈이다.



그동안 수많은 음악영화들을 봐왔다. 이를테면 존 카니 감독의 <Once>와 <싱 스트리트>, 레이디 가가 주연의 <스타 이즈 본>,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위플래쉬>와 <라라랜드> 등 국내에서 꽤 흥행한 음악영화들은 대부분 다 극장에서 직접 관람했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삶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음악’이라는 공통된 매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항상 놀랍다. 그저 주인공들이 스크린 속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에 불과할 수 있지만 사실 그 힘은 엄청나다. 우리가 어떤 날은 매운 음식이, 또 어떤 날은 달콤한 음식이 먹고 싶듯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 인물들이 대사와 표정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 관객들은 다른 대화 방식을 원한다. 그 다른 방식 중 하나가 바로 ‘음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많은 음악영화들 중에서도 <비긴 어게인>은 조금 특별하다.



<비긴 어게인>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싱어송라이터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와 남자 친구 ‘데이브’(애덤 리바인)가 뉴욕으로 오게 되지만, 남자 친구 ‘데이브’의 배신으로 혼란스러운 와중에 어느 뮤직바에서 자신의 자작곡을 부르게 된다. 그때, ‘댄’(마크 러팔로)가 그레타의 자작곡을 듣게 되고 음반 제작을 제안한다. 그들은 뉴욕의 거리를 스튜디오 삼아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특별하고 ‘살아있는’ 노래를 만들어간다.



<비긴 어게인>이 특별한 이유 중 첫 번째는 바로 줄거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까지 나온 음악영화의 대부분은 대규모인 경우가 많았다. <라라랜드> <스타 이즈 본> <싱 스트리트> 등 대부분의 작품이 자본이 많이 투입되고 세트장이 크고 화려하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액세서리나 의상은 눈을 즐겁게 한다. 그만큼 완성도도 훌륭하고 사운드트랙도 당연히 좋다. 물론,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따라 자본의 크기가 당연히 달라지기는 하지만, <비긴 어게인>은 다른 영화들보다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얕봐서는 안 된다.



 <비긴 어게인>은 거창하고 번쩍이는 세트장 대신 뉴욕의 거리와 모습들을, 와인과 스테이크 대신 맥주와 아이스크림을, 스튜디오의 정돈된 사운드보다는 간드러진 거리의 소음과 공기를 담았다. 스토리에서 오는 힘도 분명히 있지만, <비긴 어게인>만의 힘은 바로 ‘일상의 힘’이다. 음악이란 어느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한 주인공들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닌, 누구나 언제든지 일상 속에서 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극 중에서 그레타와 댄이 만든 거리 음악 밴드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밴드의 구성원이 된 것 같은 착각도 든다. 화려하고 특별한 장비들과 스튜디오가 없어도 집 앞의 작은 거리, 맥주 한 캔 그리고 악기만 있으면 누구나 뮤지션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어느 사운드트랙보다도 우리와 가장 닮아있다.



<비긴 어게인>이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소통’이다.


음악영화 속 대부분 스토리에는 ‘로맨스’가 들어가 있다. 물론, <비긴 어게인>에서도 로맨스가 들어가 있다. 하지만, 영화의 결정적인 지향점이 아니다. 주인공 그레타와 댄의 관계는 참 복잡하고 미묘하다. 영화의 처음에는 음악이 맺어준 파트너였다가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면 행복한 연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이들의 관계는 확실해진다.


명장면으로도 유명한 그레타와 댄이 음악을 들으며 뉴욕의 거리를 걷는 신을 보면, 그들이 말과 행동이 아닌 ‘음악’으로 소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거리를 걷는 내내 긴 대화보다는 음악으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은 여느 때 보다 행복해 보이고 생생하다. 결론적으로 <비긴 어게인>은 남녀가 함께 있으면 대부분 ‘사랑’의 감정이 피어난다는 대중적인 틀을 깨고 음악을 통한 담백한 내면의 소통을 그려냈다. 서로의 내면의 상처를 음악으로 위로하고 이해하는 이 영화야말로 진정한 ‘음악영화’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비긴 어게인>에서 가장 좋아하는 트랙은 ‘Tell Me If You Wanna Go Home’이다. 아마 공식 OST 앨범에는 키이라 나이틀리의 솔로 버전과 영화에서 연주한 장면을 그대로 담은 Rooftop Mix 버전이 있을 것이다. 키이라 나이틀리의 솔로 버전도 물론 훌륭하지만, Rooftop Mix 버전을 더 추천한다.


전문 뮤지션들이 아닌 각자의 삶에 충실하고 있는 사람들이 악기들을 들고 건물 옥상에 모인다. 그리고 밤공기를 느끼면서 노래를 연주한다. 실력이 조금 부족해도, 연주 기술이 화려하지 않아도 그 결점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함께 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의 소리를 보완해주고 받쳐주면서 마침내 근사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 ‘Tell Me If You Wanna Go Home (Rooftop Mix)’는 이렇게 결점이 있어도 장점으로 만들 수 있는 찰나의 순간들이 모인, 진정한 ‘합’의 노래다.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장면에 수록된 노래라서 영화를 보기 전 이 노래를 한 번 듣고 관람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번에 <비긴 어게인>을 다시 보면서 느낀 점이지만, 음악영화는 최소 두 번은 봐야 한다. 첫 번째 볼 때는 마음 놓고 사운드트랙에 빠져도 좋다. 사운드트랙이 어느 정도 마음에서 자리를 잡으면, 영화를 다시 한번 보는 것을 추천한다. 아마 두 번째에는 ‘인물’에 더 집중하게 될 것이다. 인물이 이 상황에서 이 노래를 부른 이유, 결정적 순간에 이렇게 행동한 이유 등 영화의 세부적인 요소들이 마음속에 다시 자리를 잡으면서 영화는 '내가 전에 봤던 영화’가 아닌 ‘오늘 처음 보는 새로운 영화’가 되어 있을 것이다. <비긴 어게인>은 제목처럼 다시 시작해도 충분히 가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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