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이 봉준호 감독 영화 중 가장 비극적인 영화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
봉준호 감독은 그래도 어린이 한 명은 늘 희망의 상징으로 남겨 두었다. 설국열차에서도 흑인 꼬마와 요나 (고아성)를 코카 콜라 광고를 연상하게 하는 북극곰 마지막 장면에 살려 희망으로 남겨두었다. 옥자에서도 옥자와 더불어 아기 슈퍼 돼지 한 명이 모든 다른 슈퍼돼지들의 도움으로 (사실 이 장면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이다) 그 죽음 공장에서 살아 나온다. 괴물에서도 현서는 죽었지만 중학교 1학년의 여린 몸인 현서가 거의 믿기 힘든 인간애로 지켜낸 꼬마 아이 세주는 살려준다. 극 중 박강두 (송강호)는 세주를 아들처럼 키워내고 수시로 한강에 다른 괴물이 나타날지를 주시하는 마지막은 꽤 아름답다.
그러나 이 영화, 기생충은 어떤가?
아무도 순수하지 못하다. 아무도 진정한 인간애를 보여주지 못했다. 심지어 아홉 살 다송이마저. 오히려 그냥 기우를 철없이 좋아한 여고생 다혜가 순수하다고 할까? 그러나 이것은 단지 철 없는 것이지 깊은 인간애는 아니다. 다혜는 기우가 명문대생인 줄 알고 그랬을 뿐이다. 그리고, 부잣집 아들인 줄 알았기 때문에. 아직 지지리 궁상, 가난의 냄새를 맡지 못한 무지의 상태에서 나온 선의일 뿐이다.
틈만 나면 자신의 피고용인들에게서 나는 냄새로 타인과 구별하는 박사장 (이선균)에게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타인에게 아무런 악의도 없지만 한 번도 타인의 입장을 진지하게 생각할 능력 자체가 결여된 심플한 연교(조여정)는 거의 범죄에 가까운 행위를 너무도 순수한 베이비 페이스로 유능하게 해낸다. 몇 년 동안 함께 했던 가사 도우미, 기사를 해고하는 일을 아무런 검증도 없이 남의 말만 믿고 그냥 해 버린다. 철없고 나이브한 것은 모녀가 똑같다. 물론 기택 가족의 빛나는 연기력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들은 기택 가족을 믿는 것은 아니다. 서울대를 나왔다는 케빈 선생님, 일리노이 주립대 미술심리를 전공한 제시카 선생님, 슈퍼 리치들의 운전만 수십 년 해왔다는 고급스러운 명함의 더 케어라는 회사에서 파견된 기사를 믿는 것이지 기택, 기우, 기정을 믿지는 않는다. 즉, 개인을 믿는 것이 아니고 서울대와 일리노이 주립대와 더 케어의 고급스러운 명함을 믿고 아는 사람의 말을 믿고 소문을 믿을 뿐이다.
박사장과 연교의 행태는 사실 무섭다기보다는 우습다. 사실 우스워서 더 무섭다. 수시로 피고용인들과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자기들 입장에서 수다를 떨면서도 뭔가 기택이 "그래도 사모님을 사랑하시죠?" 라던가 "자신의 기사로서의 경력을 "성공했지만 고독한 남자와의 동행" 이라든지 사랑, 동행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며
선을 넘는 말을 할 때마다 아주 사무적으로 변한다. " 오늘도 근무 연장이고 주말 수당 나가시는 거 아시죠?" 하며 갑자기 눈빛이 싸늘해진다. 사랑, 동행이란 말이 그토록 거슬리는 거다. 너랑 나랑 똑같이 아내를 사랑하고, 고독한 남자라는 말이 너무도 불쾌한 것이다. 연교는 순수한 것 같고 심플한 것 같지만 오랫동안 언니라고 부르며 믿고 같이 살았던 가사도우미이자 다송이의 결정적인 육아 도우미인 국문광 (이정은)을 한 순간에 잘라 버린다. 식구들이 결핵에 감염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남편한테 비난당할까 봐서라는 이유 때문에 문광에게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고 그냥 은근슬쩍 두루뭉실 내쫓아 버린다. 유일하게 소통하던 문광이 그만두었을 때 다송이가 받을 충격은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아예 생각조차 안 하는 듯하다. 영화에서 다송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행동 과다에 수시로 쓰러지고 예술가와 인디언을 흉내 (pretend) 내며 살아가는 아홉 살 어린이다.
1학년 때 지하실 오근세 (문광의 남편)를 보고 나서 트라우마가 생겨서라지만 오히려 다송이의 모든 행동이 다 쇼라는 다혜의 말이 진실해 보인다. 예술가인 척, 쓰러지는 척, 순진한 척 연기를 한다.
다송이는 근세가 귀신이 아닌 것도 어쩌면 알았고 모르스 부호를 알았기 때문에로 지하실에서 끝없이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는 것도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는 그 모든 현실이 비현실이고 장난이고 놀이였다. 타인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고 다 재미였다. 유일하게 소통하는 듯한 가사도우미 문광이 잘렸을 때도 별 충격 조차 받지 않은 것 같다. 아마 그렇게 갈려나간 가사 도우미, 아니 육아 도우미는 문광이 첫 번째가 아니었을 것이다. 집안일은 젬병이고 다송이에 대해 이해는 떨어지면서 이벤트나 비싼 직구 선물로 다송의 마음을 잡으려 했던 엄마 연교에게 느끼지 못했던 정과 사랑을 육아도우미에게 느껴본 적도 있었겠지만 아홉 살 다송이에겐 그들 모두 언제든 잘려나갈 수 있는 피고용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오히려 지하실 근세와 문광에게 음식을 갖다 주고 화해하고 소통하려 했던 고급스러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기택의 딸 기정은 문광의 칼을 맞고 죽을 수밖에 없었고, 늘 뜬 구름 잡는 계획이나 세우고 알 수 없는 수석 따위에 의존하며 깜찍하게도 부잣집 딸 다혜와 이어질 수 있다는 허황된 꿈을 꾸던 기우는 살아났다. 기택은 그토록 경멸했던 근세처럼 지하실 생활에 익숙해진다. 그렇게 살아난 기택과 기우 두 부자 지간의 상상과 편지는 우습고도 슬프다. 우스워서 더 슬프다. 기우가 신줏단지처럼 모셨던 수석을 그냥 시냇물에 버린 것이 그나마 희망일까? 글쎄, 기우도 어쩌면 기우 말대로 특별히 행운(수석이 의미하는)에 기대지 않고 자수성가하고 돈을 벌 수도 있겠지. 어쩌면.
기택 가족은 그렇게 되었고, 그렇다면 박사장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냥 다송이, 다혜, 연교는 그래도 돈이 있으니까 어찌어찌 잘 살아갈 것이라는 해석 자체가 우리가 얼마나 물질만능주의적인 생각인가? 모두 기우와 기택만 걱정한다. 기택은 절대 지하실에서 못 나올 것이고 기우는 절대로 반지하방을 못 벗어날 거란다. 그것만이 최대 비극이다. 그저 외부 환경만이 전부다.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 보지 못한다. 큰 집에서 살면 되고 부자로 살면 되고 이벤트와 파티를 할 수 있으면 된다. 연애를 하고 결혼만 잘하면 된다. 학교만 좋은데 들어가면 된다가 기저에 깔려 있다.
연교는 영원히 철들지 못하고 또 다른 남자를 만나 재혼해서 그럭저럭 살 수도 있겠지만 다송이는 일 학년 생일엔 케이크 먹으러 나온 귀신 근세를 보고 2학년 생일엔 그 근세가 자기가 가장 좋아하고 따르던 미술 선생님 기정이 칼에 찔려 죽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 박사장은 인자했던 운전기사 기택이 찌른 칼에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다송이가 어떻게 되었을까? 더구나 귀신 근세는 평범해 보였던 가사도우미 충숙의 꼬챙이에 찔려죽는다.
영화 하녀에서 친구처럼 따르던 육아도우미, 가사도우미 전도연의 자살을 눈앞에서 목격한 그 딸의 앞날과 비슷해지지 않을까 싶다.
금사빠 다혜는 어떻게 되었을까? 희망적으로 도저히 상상이 안된다. 부유한 박사장의 미망인, 아들, 딸 들도 참 처연해 보인다.
기택 가족은 나름 영어도 잘하고 읽은 책도 읽고 사회생활도 능숙하게 해내고 이전에는 대만 카스텔라 사장, 치킨집도했던 중산층이었다. 자존심도 있고 능력도 있었던 사람들이다. 기우가 삼수, 사수를 할 만큼 뒷바라지를 해줄 수 있었고 기정의 미대 준비를 뒷바라지 할 수 있을 만큼 그럭 저럭 살았다. 기우는 명문대생을 연기할 만큼 그럴듯한 외모에 번듯한 옷도 있었다. 기정도 한순간에 번잡한 다송을 제편으로 만들수 있을만큼 명민했고 겉명함에만 걸신들린 연교를 주무르는 것은 식은죽 먹기일 정도로 예뻤고 날씬했고 똑똑했다. 그러나 운이 나빴고 처음 기정, 기우의 취직이 성공하자 바로 잘 근무하던 윤 기사와 문광을 자르고 그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 사기를 친다. 문광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는 박사장 가족의 정신적 수준과 데칼코마니 수준이다. 기택 가족은 가난했지만 가난하다고 도덕적이거나 인간적이지는 않았다. 부자 박사장네와 별로 다름 없는 정신적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박사장네는 순진과 무지라는 악을 가지고 있고 기택 가족은 무배려, 거짓말이라는 악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 누가 우리보다 더 어렵겠나 싶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원래 제목으로 하려 했던 데칼코마니는 이 4인 가족 두 가족의 구조를 의미하는 것 뿐만이 아니다. 바로 데칼코마니는 이 두 가족의 정신적 수준이었다. 부유하다고 삶의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는 것이 한정 없이 편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가난하다고 착한 것도 성실한 것도 아니다. 물론 돈이 많은 불편함을 상쇄시켜주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이 두 가족이 빈부의 차이만 있었을 뿐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점에서, 영혼의 수준의 차이가 거의 없는 데칼코마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것이 이 두 가족의 결합, 불편하고 위험한 동거가 정말 재앙 수준의 커다란 비극을 자초하게 된 근본 원인이다. 그리고, 그런 조건을 방관하고 자초하고 부추긴 이 거대한 자본주의. 빈부 격차외에는 다른 수준은 별 차이도 안 나는 사람들에게 배려, 협동보다는 엄청난 위화감을 조성해 낸 이 거대한 시스템 역시 이 재앙의 근본 원인이다.
미성숙하고 부주의하고 타인에 대한 인간애와 사랑이 많이 부족한 사람들은 어디서나 티가 나고 문제를 일으킨다. 주변 환경이 그런 성향을 감춰줄 수 있을 만큼 풍족하지 않은 한. 비극적인 조건이 성숙되기 전에 그 사람들은 언제나 호인이고, 더없이 착한 분들이고 심플하고, 선을 넘지 않고 자존심이 살아있고 딱딱 자기 할 일 잘하는 건전한 서민이다. 그러나 부주의하고 미성숙한 영혼들은 작은 틈에도 매우 취약해진다.
부자들이 더 착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충숙의 커다란 착각이다. 부자라고 착하고 가난하다고 악하다는 이분법이 통할만큼 인간은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연교는 박사장의 지적질과 은근한 무시를 제일 두려워하고 박사장은 일찍 성공한 사업가로 수시로 자기에게 선을 넘어오려는 피고용인들 때문에 피곤하기만 하다.
박사장이 냄새 얘기를 할 수도 있다. 박사장은 문광이 해고되고 난 후에 살림을 못하는 연교 때문에 자기 옷에서 냄새가 풀풀 날것이라고 투덜거리고 문광이 갈비찜을 정말 잘했는데 그걸 못 먹게 되어 너무 아쉽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토로를 한다. 그냥 박사장은 어쩌면 냄새에 민감한 사람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박사장이 선을 넘고 연교가 선을 넘은 건 그토록 사랑하는, 그래서 별도 달도 따주고 싶었던 아들 다송이의 생일파티에서였다. 연교는 자신의 피고용인들이 물난리에 난 줄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고 베이비 페이스의 순수하고 심플한 얼굴로 깔깔거리며 빠르게 말하면서 그들을 소환한다. 주말 수당을 주기 때문에 미안할 필요도 없었다. 기택을 데리고 엄청나게 많은 양의 물건들을 쇼핑하며 기택의 행색이나 표정을 단 한 번도 살피지 않는다. 이는 거의 범죄 수준이다. 기택의 표정은 살피지 않으면서 기택의 냄새는 귀신같이 맡는다. 아마 구호소에서 얻은 옷에서 나는 냄새였고 제대로 말리지 못한 빨래에서 나는 썩은 냄새였겠지. 그러나 그 냄새가 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는다. 박사장도 다송을 위해 기택에게 인디언 분장을 시키면서 연극을 시키지만, 기택의 불구죽죽 한 얼굴, 평소의 인자한 가면을 벗고 걱정스럽고도 애매하면서도 불안한 얼굴 표정을 전혀 잡아내지 못한다. 박사장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오직 냄새만 신경썼지, 즉 피고용인이 자기를 피곤하게 할때, 선을 넘어올 때만 그의 존재를 비로소 존재로 인정했지 그 이외에는 기택은 그냥 기사고 벤츠만도 못한 도구였을 뿐이다. 불쾌하게 했을 때만 그를 오히려 불쾌한 "존재"로 여겼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그 외의 상황에서는 피고용인은 언제나 선을 넘어오면 안되는 물질, 도구, 비존재인 것이다. 돈만 내면 언제나 소환할 수 있는. 아내를 사랑해서 이런 이벤트에 동참하지 않느냐고 묻는 기택, 최소한의 가장으로서의 동질감을 갖고 싶어했던 기택에게 정색하며 지금도 근무수당 받고 하는 일 아니냐며 차갑게 본성을 숨기지 못한다. 송강호의 표정 변화는 가히 압권이다. 끝까지 호인 연기를 했고 스스로도 타인에게도 호인으로 보였던 그가 박사장을 난데없이 살해하는 데는 영화 후반부부터 시작되는 송강호의 미묘한 표정 변화, 심리 변화를 표현한 연기가 아니었다면 정말 뜬금 없고 난데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송강호의 악인으로의 변모가 설득될 정도로 그의 연기는 좋았다. 즉 기택은 죽어가면서까지 박사장에게 리스펙을 선언한 근세처럼 유아적으로 퇴행하지 않았다. 최소한 분노할 줄 알았던 것이다.
송강호가 호인이자 평범한 선인에서 악인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린다. 박사장에게 리스펙을 외치는 근세나 참 좋으신 분들이야라고 하는 기택은 사실 호인이 아니다. 그들도 연교나 박사장네가 일리노이 주립대, 서울대, 아는 사람, 더케어라는 고급스러운 명함, 인터넷에 검색한 불안장애를 갖고 있는 어린이에 대한 그럴듯한 묘사에 혹했던 것처럼 기택이나 문광네도 박사장의 성공, 그 집에서 살 수 있을 만큼 유능함, 급여에 인색하지 않은 젊고 아름다운 연교에 혹한 것이다.
기택이 박사장을 찌르는 장면은 매우 비극적인 장면이지만 무능하고 몰락한 경제적 하층민인 기택이 호인과 유머러스한 얼굴로 감정노동을 하며 살아가다가 인간이 인간에게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박사장의 행동 앞에서 갑자기 자각한 분노에 따른 행동이다.
기정이 죽어가는 상황, 그리고 우습고 유아적인 행태로 박사장을 존경했던 근세가 죽어가던 상황에서 오직 자기 자식인 다송이가 기절했다는 이유만으로 빨리 운전하든지 얼른 차키 달라고 소리치는 박사장, 거기에 죽어가는 근세 냄새에 절대적인 혐오를 표시하며 코를 틀어쥐는 박사장의 비인간적인 모습에 대한 우발적이지만 최초의 자각이고 분노였다.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자식밖에 모르는, 그리고 냄새나서 냄새난다고 했던 단순히 부주의한 평범한 박사장이 자기 자식의 기절이라는 순간과 타인의 죽음앞에서 드러내는 극한의 이기적이고 유아적인 모습과, 몰락했지만 사뽀로 맥주도 마시고, 나이키 양말도 신고, 웬만한 영어는 연교만큼은 하고 부부 사이도 좋은 평소에는 사람좋은 호인이었던 기택이 모욕감을 느꼈을 때 순식간에 우발적으로 악인임을 드러내는 모습은 말 그대로 데칼코마니다.
그들은 그 전에는 그냥 평범한 부자, 평범한 가장이자 운전기사, 동네 아저씨였을 뿐인데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얼마나 악인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악의 평범성. 자꾸 그 말이 생각나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부주의, 기만, 순간적인 분노, 이기심이 모두 분출된 이 영화에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주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홍상수 감독이 남녀 탐구생활이라면 봉준호 감독은 인간탐구 및 시스템 탐구생활이라고나 할까? 설국열차에서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시스템 이야기를 했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시스템을 바꿀 수 없는 현실에서 예정된 비극을 바꿀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 영화는 빈부 격차를 주제로 가장한 인간의 영혼에 관한 이야기다. 타인에 대한 이해나 사랑이 없는 사무적인 동거, 미성숙하고 부주의한 영혼들끼리의 동거가 어떤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지. 단지 고용인, 피고용인 관계가 아닌 같은 집에서 유사 가족으로 살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아주 서늘하게 관조한 영화이다.
사족 같지만 정신 번쩍 든다. 비극의 원인은 우리가 아는 거대한 매머드 같은 존재가 아니다. 단지 자본주의 때문만도 아니다. 바로 우리 내면의 부주의, 허영, 무시, 분노다. 스스로 있었는지도 몰랐던 그 감정이 어느 날 우리를 서늘하게 규정해 버린다. 어디 숨을 곳도 없이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대놓고 무심코 코를 틀어쥐게 되고 단지 냄새를 역겨워 하는 누군가를 그렇게 우발적으로 살인해 버린다. 그리고 어이없이 박사장 미안합니다. 손쉽게 지하실에서 혼자 사과를 한다. 그냥 샤프하고 성공한 사업가, 그냥 철없는 부잣집 사모님, 돈은 없지만 착하기는 한 몰락한 중산층 남자로 살 수 가 없다. 인간의 밑바닥은 언제나 손쉽게 드러난다. 아주 작은 틈새만으로도.
한 발짝 앞에 뭐가 있을 것인가? 과연 삶이, 운명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무엇을 앗아갈 것인가? 다 잃고 난 후에도 잃지 않을 것은 무엇인가?
(봉준호 감독님, 다음 영화도 그런 질문 계속 해주실 거죠?, 그리고 지금처럼 계속 유머만은 잃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