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쿨하지 못한 인간
생일날 지인에게 선물 받은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이라는 책을 틈날 때마다 하나씩 읽고 있다. 그냥 부담 없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책. 어느 날 밤, 이 책을 꺼내 들어서 읽다가 조금 공감이 가서 필사 하기 시작했다.
나는 '쿨'하고 '드라이'한 사랑 같은 건 이제 잘 믿지 않게 됐는데
그건 물기가 없는 곳에선 어떤 생명도 자라지 않는 것과 같다.
<책 속에서>
감정에 얽매여서 조금은 지긋지긋한 연애를 경험하고 나면 다음번에는 '쿨'한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 그러다가 몇 번의 연애를 더 하다 보면 약간의 형태의 차이가 있을 뿐, 말처럼 그게 참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감정으로 하는 '연애'에 대체 '쿨'한 게 어디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애초에 나는 '쿨'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 것이다. '쿨'하지 못하니까 '쿨'하고 싶었던 거겠지. 몇 번인가 '나는 참 쿨하지 못해.'라는 생각을 하고 나면 '쿨하다'라는 것만큼 무신경한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쿨'한 게 뭔지도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애초에 그렇지 못한 사람인 것이다. 어라? 내가 조금 '쿨' 해졌나? 생각이 들면 이건 또 내가 진짜 상대를 '좋아하는 거 맞나?' 하는 또 다른 고민을 하고 자빠진 사람인 것이다.
조금 쿨-하게 할 필요가 있어.
원거리 연애를 하고 있던 어느 때였는데 일이 너무 바빠서 긴긴 시간 끝에야 겨우 만나고 헤어진 후,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보고 싶어도 바빠서 보지 못한다는 게 새삼 서글퍼서 잠깐 울적하였다 했더니, 그가 "그러면 네가 힘들어, 조금 쿨해질 필요가 있겠다."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이 사람에게 감정에 호소하고 질질 짜고, 만나 달라 애걸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얼마나 더 쿨해지라는 건가 싶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쿨해서 내게서 '잠적'할 수 있었나 보다. 그래서 '쿨'한 게 뭘까?
내가 좀 '쿨'해진 건지, 아니면
그냥 '친구'정도의 감정이라 그런 건지 잘 모르겠어.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과는 아주 다른 타입의 사람을 만나게 됐다. 연령이나, 성향이나, 외모 모든 것에서 다 새로운 타입의 사람인데 뭔가 내가 덜 감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조금은 덤덤해진 것 같은 생각도 들어서 '나 조금 쿨해진 건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됐다. 이것은 상대에 따른 또 다른 사랑의 형태인가, 아니면 내 감정이 그냥 '친구'정도의 감정에 머물러 있어서 그런 것인가. 친구 N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 같은 사랑도 있는 거고, 친구 같은 사랑이 나쁜 것도 아니고, 친구 같은 사랑이 더 너에게 맞을지도 모르고, 친구 같은 사랑이 더 오래 행복할 수도 있어."라고 얘기하는데 그 생각에 동의는 하지만 낯선 감정인 것은 분명하다. N은 "나도 완전히 새로운 타입의 남자를 만났더니, 결국 결혼해버렸어, 너도 조심해라?" 하고서 웃는다.
애초에 사랑하면서 '쿨'하다는 게 가능한 건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쿨'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전혀 '쿨'하지 못한 감정적인 사람이다. '쿨'하다면 모든 사랑과 이별에서 덜 힘든지 궁금해서 한 번쯤은 '쿨'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여전히 하고 있다. '쿨'하다고 스스로 얘기하는 사람들 중에 진짜 '쿨'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냥 사랑하고 싶으면 하고, 언젠가 끝이 날 때 더럽게 아플 걸 알면서도 사랑하고, 곧 죽을 것처럼 아프다가도 또 견디는 거, 그건 '쿨'하다고 안 쳐주나? 내가 끝끝내 '쿨'해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사랑의 형태가 모두 똑같은 것도 아니고, 모두의 방식이 다 같지 않은데 앉아서 고민하고 있어봐야 무슨 의미야, 그냥 맘 가는 대로 하는 거, 그 순간의 감정에 충실한 게 '쿨'한 거지.라고 '쿨'하지 못한 내가 말해본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