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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서가 Oct 26. 2022

적절한 거리를 두고 알맞게 그리웠습니다

신유진의 <창문 너무 어렴풋이>를 읽고


나에게 신유진은 서문이다. 다른 책의 서문을 읽을 때조차 나는 매번 신유진을 떠올린다. 이 얘기를 조금 해보자면, 작가의 <열다섯 번의 낮>, <열다섯 번의 밤>을 산 날이다. 빨리 읽고 싶어 꾸역꾸역 일을 끝낸 밤에 <열다섯 번의 밤>을 펼쳤다. 그때까지 나에게 책의 서문이란, 지금 꼭 읽어야 할까? 책을 다 읽고 나서 읽어야 할까? 고민하게 하는 조금 귀찮은 것이었는데 그날 읽은 책의 서문은... 뭐라 설명할 수도 없다. 나는 서문만 여러 번 읽다 책을 덮었고 아직까지 펼치지 못했다. (여기저기 읽어보라고 하고, 노트에 옮겨 적어도 보았는데 책은 못 읽겠더라) 그때부터였다. 작가님을 좋아한 게. 


다정스럽다. 조금 서늘할 때마저 다정스럽다.('다정하다'가 아니라 '다정스럽다'라고 하고 싶다) 서문과 함께 나는 작가의 집을 천천히 둘러보고 이 창, 저 창에 드는 색색의 빛을 느껴본다. 그 빛은 독단적으로 들어와 여기저기 흔적을 남겼을 테고, 그 흔적은 작가의 눈과 마음과 손으로부터 글이 되었음을 느낀다. 허락 하에 나는 작가의 많은 기억을 들여다보았다. 서문의 글을 빌려 말하고 싶다. 창가에서 보는 모든 풍경이 그렇듯 적절한 거리를 두고 알맞게 그리웠습니다.라고.


<창문 하나, 기억> 속 글들이 참 좋았다. 바로 얼마 전에 읽은 박연준 작가의 <여름과 루비>로 내가 아직 유년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 그런 걸까. 다 좋았다. <엄마의 창문>이 특히 기억에 남는데 이 글 속에서 작가는 '나는 잘 모르겠다'라는 말을 여러 번 쓰고 있다. 이 애매모호한 표현이 글에서만큼은 무책임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정말... 좋았다. 누구라도 공감하지 않을까.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서 '나는 잘 알겠다'라고 표현하는 글이 있다면 나는 읽지 않겠다.


자두주는 어떤 맛일까? 자두나무, 체리나무, 노간주나무, 사과나무의 향기를 나도 맡고 싶다. 프랑스, 마르땅과 이안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작가의 정체성과도 같은 연극과 글쓰기, 뒤라스와 한트케까지, 그녀를 이루는 조각조각을 따라 함께 여행했다. 아, <창문처럼 나를 열면>의 표현대로 우리는 글을 읽음으로써 신유진이란 창을 열고 사랑한 것, 외로운 것, 슬픈 것, 기쁜 것, 얻은 것, 잃은 것들을 들여다본 것이겠다. 그렇겠다. 그렇지만... 창을 열어 보아도 자두주만큼은 먹어보지 않고는 어떤 맛인지 모르겠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자두주의 맛이 아니라 그냥 자두의 맛이라서 혀 양 옆에서 자꾸만 침이 솟아난다. (아쉬운 대로 자두를 사러 마트에 갔는데 너무 비싸서 내려놓았다. 내가 아는 그 자두가 아닌가 봐, 금두인가 봐.) 서문만 읽고 덮어둔 책은 이제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제 아끼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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