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상을 찍은 산이다. 신입생 때 가입했던 동아리는 5월이면 2박 3일 일정으로 지리산을 종주하는 연례행사가 있었다. 1학년 때는 선배를 따라, 2학년 때는 후배를 이끌고 지리산을 다녀온 것이 내 등산 역사의 시작이자 마지막이었다. 등산동아리도 아닌데 선배들은 집단생활이란 이런 것이다라며 '악으로 깡으로 정신'을 들먹였고, 계단도 잘 오르지 않던 몸뚱이로 악으로 깡으로 지리산 능선을 걸었다. 아니, 오르막과 내리막은 걷고 평지는 뛰었다. 등산인지 극기훈련인지 모를 그 경험은 나에게 산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기억만 남겨놨다.
'힘들다. 괴롭다. 숨차다. 힘들다. 괴롭다. 숨차다. 다리가 아프다. 힘들다. 괴롭다. 숨차다. 온통 나무와 돌뿐인데 뭘 보라는 건지 모르겠다. 힘들다, 괴롭다. 탁 트인 정상. 우와! 눈이 시원하다. 전망 좋구나. 뿌듯하다. 다시 내려가야 한다. 힘들다. 허벅지가 아프다. 괴롭다. 발이 미끄러진다. 힘들다. 괴롭다. 여기 왜 왔지?......' 뭐, 그랬다.
3학년이 되어서 동아리 활동을 등한시하며 지리산 종주도 그만뒀다. 다시 산에 오를 일은 없었다. '산에 가자'는 말은 '사서 고생하자'는 말과 같았다. 가진 것 없던 젊음이고, 이미 사방이 고생길이다. 굳이 그 고생길에 '산'까지 보탤 필요는 없지 않나.
산을 다시 오른 건 중년의 전업주부가 되고부터였다. 다니던 직장이 폐업한 뒤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을 얻었지만 자아는 잃어가는 것 같았다. 자아를 지키고 자존을 끌어올리기 위한 사색의 시간이 필요했다. 수행자처럼 살아야 하나... 그래, 고행길을 가자. '사서 고생'하기 위해 동네 뒷산을 올랐다.
해발 183.1m라 '산'이라 부르기 좀 멋쩍지만 하여간 '산'이다. 처음엔 이 산도 절반밖에 못 갔다. 경사가 있는 183미터는 우습게 볼 게 아니더라. 달달 거리며 수행하는 심정으로 매일 갔더니 어찌어찌 정상을 찍었다. 사방이 뻥~뚫리며 우리동네와 남의 동네까지 한눈에 보였다. 기분이 좋았다. 뭔가 정복한 느낌? 성취감? 하여간 뭐 그렇고 그런 좋은 기분.
뒷산이 익숙해지니 좀 더 높은 산에 욕심이 생겼다. 친한 언니와 서대문 '안산'을 올랐다. 산 꼭대기에서 서울이 다 보였다. 멋지다. 또 다른 산의 정상도 밟고 싶다! 다음엔 인왕산으로 가자!
다음 목표를 '인왕산'으로 정한 이유는 단순하다. '안산'옆에 있는 산이라 친근해서였다. 하지만 나는 하늘이 내린 길치 아닌가. 초보 등산러가 인왕산에서 길 잃으면 어쩌지? 불안한 마음에 남편에게 같이 가자고 부탁했다.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지만 한때 복근 탄탄했던 김종국 못지않은 헬써아니었나! 운동 마니아였던 남편이 등산을 마다할 리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남편이 원한 곳은 남산 둘레길이었다. 둘레길? 둘레에기이이일?
정상을 밟는 쾌감을 느껴야 하는데 둘레길은 무슨 얼어 죽을 둘레길인지 모르겠다. 남편은 "점심시간에 자주 걷는데 너무 좋아. 우리 부인과 함께 걷고 싶더라공"라며 나를 설득했다. '함께 걷다'가 얼마만이냐. 그러자, 설득 당해주자. 오랜만에 설렁설렁 걷는 데이트도 좋지.
한옥마을을 지나 동국대 옆길로 가로샜다. 야트막한 동산을 넘으니 남산 둘레길이 나왔다. 이따위 평지~라며 속으로 우습게 보며 걸었다. 한가롭게 걷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운동도 안되고 성취감도 없는 둘레길을 많이도 걷는구나. 하긴, 제철 맞은 봄 햇살도 따사롭고 공기도 상쾌하니 산책하기 딱 좋을 때다. 느긋하게 걷다 보니 나도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다리가 편하니 눈이 바빠진다. 둘레길 주변 나무들은 잎과 꽃이 한창이다. 힘껏 올라온 어린싹들은 햇살을 먹고, 바람을 입으며 자란다. 아직도 의심 많은 나무들은 겨울이 가지 않았을 거라며, 언제 추워질지 모른다며 걱정스레 새싹을 숨긴 채 앙상한 몸으로 버티고 있지만 시간은 거꾸로 가는 법이 없다. 나무의 걱정은 봄비가 씻어줄 것이다. 새싹보다 먼저 얼굴을 내민 성질 급한 벚꽃은 거의 다 떨어지고 없었다. 벚나무는 붉은 꽃술만 남은 자리에 초록잎이 나와 멀리서 보면 갈색처럼 보였다. 갈색은 가을색이다. 힘든 시기를 앞둔 가을의 갈색은 고독해 보여도 우아하게 느껴지지만 봄의 터질듯한 노란색, 연두색, 분홍색의 귀여움 속에서는 한없이 칙칙하다. 색도 때가 있다. 녹음 전의 봄산은 다채롭다. 연노랑, 연두, 초록, 연초록... 쉬엄쉬엄 걸으며 생명의 색을 맛보았다. 한 달 지나면 이 연한 색들은 사라지고 없겠지? 그땐 또 그때의 색이 있다.
"오늘만 사는 연두색히들.흐흐흐" 말장난을 해본다. 웃음이 나왔다.
자연은 내일을 걱정하며 사는 것 같지 않다. 비를 맞고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오늘의 색을 최선을 다해 펼쳐 보인다. 허벅지 터지게 올라 산 정상에서 마주한 탁 트인 전망을 떠올려본다. 전망만을 만끽하며 등산길에서 본 풍경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풍경'으로 퉁쳤던 그 속에 오늘의 삶이 있다. 꼭대기가 아니라 풍경 속을 걷고 있는 지금, 나도 자연처럼 이 순간을 산다.
충무로역 4번 출구로 나와 '남산골 한옥마을'을 통과해서 동국대길로 올라갔어요.
동국대 옆길로 가로새니 동네 주민분들을 위한 운동기구가 간단히 놓여있는데 스트레칭 하기 딱 좋았습니다. 간단히 스트레칭하고 야트막한 산길을 걸었습니다.
산길을 통과하니 바로 둘레길이 나왔어요.중간에 빠져나오는 길이 많으니 원하시는 아무 곳에서나 빠져내려 오셔도 될 듯. 아무 방향에서 빠져나와도 서울의 중심입니다. 마음에 드는 지하철 타고 집으로 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