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생존법칙
대학 시절, 유난히 전공에 대한 애착심이 남달랐던 나는 수많은 전공서적들과 강의에 파묻혀 지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누군가 내게 “왜 그렇게 재미없게 대학시절을 보냈어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곧바로 “사학은 나의 모든 것이었으니까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만큼 역사는 나의 생존의 이유이자 정체성이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나의 꿈이 작가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고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그 꿈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인생은 예상치 못한 삶의 연속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20대 초반에 나는 남들과는 달리 유난히 일찍 인생의 어두움과 고통, 그리고 그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뼈져리게 느꼈다. 그 이후 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수도 없이 사색했고, 안 그래도 진지한 내 성격은 더욱 진지하고 말이 없게 되버렸다. 1학년 신입생 시절, 한 교수님께서 이런 말을 해주신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바꿀 수 없는 세 가지’에 대한 것이었는데 부모, 학벌,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신은 내게 이 세 가지를 선택할 권리를 주시지 않았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신이 어떤 가정에 살게 될지, 그리고 어떤 학교와 전공을 선택할지 미리 계획하지 않는다. 만일 선택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남모르게 지니고 있는 상처와 고통과 열등감은 절반으로 줄어들지도 모른다. 아예 없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아마 반 정도로 줄어들지 않을까? 글을 쓴다는 것은 재능이 있다면 쉬운 것이지만은 어느 한편으로는 ‘배고픔’이 있어야 한다. 얼마 전에 작고한 작가 폴 오스터(Paul Auster)는 자신의 책 『빵굽는 타자기』에서 자신의 20대 초반과 30대 겪었던 일들에 대해 자전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책을 다른 말로 ‘젊은 날의 실패의 연대기(A Chronicle of Early Failure)’로 지칭하면서 자신의 문학적 자양분을 ‘가난과 경험’으로 정의한다. 가정의 불화와 비극적인 말년은 그의 삶에서 지울 수 없는 상처이고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글을 썼고 그 결과 그의 작품들은 다수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오늘날 읽히고 있다. 이처럼 글은 희생을 필요로 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더 넓은 세상을 누리며 글을 쓰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보통의 작가들은 불안정한 경제력이나 상처와 고통을 빌미로 자신의 삶을 연장하며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살아가는 얼마 안 되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 또한 오스터의 이러한 ‘짠함’이 동질감이 느껴지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 할 정도로 나는 그저 글을 쓰고 글은 이러한 나의 고통을 대가로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하게 해 줄 뿐이다. 요즘 내가 원하는 한 가지는 내가 죽기 전 무엇이라도 좋으니 글을 끄적여 놓은 노트나 원고가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나의 인생과 잡다한 이야기를 엮어 언젠가는 책이 되어 이 세상에 있는 이들에게 읽혀지는 것이다. 이 외에 다른 것들, 결혼이라든지 연애, 가정 등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보지 못하였다. 다만 가정을 이룬다면 나는 나의 궁핍함과 고통을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 그러므로 나는 결혼에 대해 무엇이라고 쉽게 정의내리지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드러내거나 보여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의 생존의 이유이자 살아가는 이유가 글쓰기에 있으며 글은 절대 공짜로 자신과 대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 글과 나의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본질적인 이유를 찾았다는 것이 내 실존의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