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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보일 듯 말 듯한 거품 덩어리

달을 멀리서 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by 녹색나무
이모는 더 걸으면 달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달은 언제나 너무 멀리 있다. 그렇게 멀리 있으면 보이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닌가. 터무니없이 멀리 있기 때문에, 몇 걸음 걷는다고 해서 달과 가까워질 리 없다. 너무 멀리 있기에, 몇 걸음 걷는 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지만, 방향을 잘 잡고 조금만 걸으면 달을 보게 된다.

문보영, 『어떤 새의 이름을 아는 슬픈 너』, (서울: 위즈덤하우스, 2024), 58.


슬픔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웃으며 대할 수 있을까.

슬픔을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안데르센의 동화에 등장하는 인어공주가 마녀에게 다리를 얻는 대신 목소리를 잃고 끝내 사라지는, 거품 덩어리와도 같다고 해야 할까. 모든 사람은 언젠가 슬픔을 마주하게 되고 슬픔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우리의 삶을 강타하는 불청객과도 같다. 마치 안데르센의 다른 동화 『어머니 이야기』에 등장하는 죽음(의인화)이 바로 그렇다. 죽음은 추운 겨울, 무거운 말 외투를 걸친 늙은 나그네의 모습으로 어머니의 집을 방문한다. 어머니는 이 낯선 손님의 정체에 대해 전혀 모른 채, 그를 냉정하게 쫓아내지 않고 따뜻하게 대접한다. 그러면서 그에게 질문한다. “제 아이가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저 아이를 제게서 데려가시기를 원하실까요?" (정확하게는"이 아이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라고 질문한다. 이러한 어머니의 질문은 결국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복선(伏線)이다. 죽음은 아이를 데려가고 어머니는 아이를 찾아 나선다.


여태까지 가지고 있던 무언가를 잃는 상실감, 이것이 슬픔이 우리에게 주는 상처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필자가 좋아하는 시인인 문보영 작가님의 『어떤 새의 이름을 아는 슬픈 너』 라는 책으로, 본 책은 ‘슬픔’을 주제로 하며, 본 소설의 주요 플룻은 ‘고길자’라는 인물의 죽음과 그것에 대한 조카 경섭의 회상, 현재와 과거라는 하나의 프레임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주요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물과 장소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 읽는 이로 하여금 빠져들게 한다는 점이다. 둘째, 시인만의 시적인 표현은 이 책이 지니는 독특성이자 다른 소설과 구별되는 차별성을 지니게 한다. 서두 부분인 ‘효진’의 독백이 그렇다.


효진은 창밖의 나무가 사람의 뒷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나무는 표정이 없어. 그건 나무가 우리에게 늘 뒷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이야. 효진은 번갈아 나타나는 밀밭과 올리브나무 밭을 바라보며 생각했다.1)



주인공 효진은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가 사람의 뒷모습 같다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나무는 의인화가 되고 나무는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 일종의 가면을 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뒷모습’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슬픔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순간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라든가 “저 사람의 뒷모습이 보여서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 문보영 작가의 독특하고 시적인 표현과 더불어 풍부한 상상력은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주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특히 길자의 사후세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처음 이 소설은 길자의 사후 세계와 길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부부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구성으로 쓰였어요. … 길자는 길 한복판에서 깨어나요. 긴 줄이 있고, 사람들은 모두 관을 가지고 있죠. 길은 조금씩 짧아집니다.…그 세계에서 관은 물건을 수납할 수 있는 유일한 사물이에요.…선크림이 필요한 사람도 있고, 이불이 필요한 사람도, 수면제가 필요한 사람도 있죠.2)


즉, 문보영에게 죽음은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과 별반 다른 것이 없는 일상 그 자체인 것이다. 죽은 사람들도 물물교환을 하고 자신의 앞날에 대해 점을 치며, 미래에 대한 궁금증과 불안으로 살아간다. 장례식을 치른 경섭은 꿈속에서 이모 길자를 만나는데, 그는 허름한 나무 관에 누워있었고 수십개의 관의 행렬 속에 길자가 있는 것을 본다. 길자는 어디 가느냐는 경섭의 물음에 “달 보러”라고 짧게 답한다. 달은 항상 가까이 있는 것처럼 닿을 듯 말 듯 하지만 멀리 있는 아득한 존재다.3)


이것은 꿈일 수도 있고 무언가를 향한 아득한 목표일 수도 있다. 다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멀리 있다는 것이다. 이는 빛이 통과하면 하나의 점만 보이고 물체와의 거리에 따라 허상(虛像)과 실상(實像)이 겹쳐보이는, 볼록렌즈를 연상케 한다.


사람의 인생을 많은 나무가 있는 울창한 숲으로 비유할 수 있다면, 슬픔은 그 중 하나의 나무이고 그 나무는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뒷모습만 보여주는 외로움이다. 우리는 슬픔을 마주하면 늘 놀라고 눈물이 터지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지만 그럼에도 슬픔은 우리를 찾아온다. 아스라이 멀리서.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멀리 존재하고 있는 달처럼 말이다.


각주

1) 문보영, 『어떤 새의 이름을 아는 슬픈 너』, (서울: 위즈덤하우스, 2024), 7.

2) 위의 책, 86.

3) 위의 책, 5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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