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엔딩

저의 꽃말은 봄이 아닌 여름이랍니다.

by 녹색나무

4월 달이 다가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너무나도 명백하면서도 분명한 일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는 다름이 아닌 벚꽃의 존재감이다. 아니 벚꽃의 유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까? 개인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봄이면 여름을 기다리고 여름이면 가을과 겨울을 기다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생물보다 성격이 급한 생명체이다. 비단 계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날씨가 따뜻하면 덥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날씨가 시원하면 춥다고 여길 정도니, 만일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계절, 곧 춘하추동(春夏秋冬)이 생명을 가진 그 무언가였다면 한번쯤은 “너는 도대체 나한테 왜이러는 거야?”라고 화를 불같이 내며 보이지 않는 이 세상 어디론가 떠날 수도 있었으리라.

누군가는 인간을 ‘턱 치니 억!하고 죽어버리고 마는 연약한 존재’로 정의했다지만 내가 생각하는 인간은 연약함과는 거리가 있다. 인간은 툭 치면 힘들다고 칭얼거리며, 정작 힘든 일이 닥치면 그 어떤 존재보다 끈질기게 버티는 내유외강(內柔外剛)의 기질을 지닌 신비로운 존재이다. 그러니 그 누구보다 가장 높은 하늘에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다른 일이 아닌 ‘이 세상에서 제일 연약한’ 존재인 인간이 매일 상달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그 누구보다도 재빠른 ‘눈 깜짝할 새’라는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심부름꾼을 통해 그 분의 뜻을 전달하시느라 진이 다 빠지셨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러한 의문을 다음과 같은 말로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벚꽃과 인간은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 건가요?’ 다시 말해 벚꽃과 당신이 공범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를 묻는 것인데, 모든 존재가 그렇지만 제 아무리 가장 변덕스러운 인간이라해도 가끔 가다 한 번씩 제정신을 차릴 때가 있는데, 그것을 만일 한 사람의 공으로 돌릴 수 있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다른 무엇이 아닌 ‘시간’의 덕분이다. 왜냐하면 제 아무리 인간이 변덕스럽게 투정을 부린다해도 시간 앞에서는 제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 한들, 한 마디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시간은 그 옛날,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바벨탑을 쌓았던 보이지 않던 인간의 자만에도 끝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참으로 고마운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시간의 공은 현재진행형이다.

시간이 있기에 모든 생명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나이를 먹어가며, 시간이 있기에 모든 존재는 시간 속에서 시간만을 바라보며 자신이 현재 철저히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한다. 4월이 되면 벚꽃은 어김 없이 질 것이며, 다시 벚꽃이 피기까지는 365일을 기다려야 하지만, 이러한 시간도 알지 못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으니, 벚꽃이 지기는 질 것인데 과연 어떻게 지느냐에 관한 문제이다. 벚꽃은 봄에 피는 꽃들 중 가장 빨리 피고(물론 벚꽃보다 먼저 피는 꽃들도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가장 빨리,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발자국을 지워버림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존재이다. 이 시기가 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벚꽃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의자왕의 삼천 궁녀처럼 과감히 자신의 몸을 던짐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길가를 자신의 피로 가득히 물들이는데, 이러한 벚꽃의 최후를 보노라면 신라 23대 임금인 법흥왕 때 불교의 공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이차돈의 순교가 떠오른다. 아침엔 네 다리, 점심엔 두 다리, 저녁엔 세 다리로 걷는 존재는 사람이지만 길을 가다 우연히 땅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벚꽃의 사체들을 본다면, 아침엔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눈에 안 띄게, 점심엔 할 수 있는 한 가장 매혹적으로 유혹하며, 저녁엔 눈처럼 바람과 함께 사라지며 도리어 여름을 알리는 ‘벚꽃 엔딩의 서막’임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새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