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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불빛 Jan 20. 2022

에너지 전환의 꿈과 혼돈

<뉴 맵>, 대니얼 예긴

1. There will be oil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2007년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에는 성공에 대한 야망과 집념, 탐욕과 경쟁심으로 가득 찬 19세기 말 미국의 석유 시추 업자 대니얼 플레인뷰(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등장한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오명도 굴욕도 기꺼이 감수하며, 가족마저 버리간 채 오로지 석유를 차지하고자 삶의 모든 것을 바친다. 마치 석유를 바라보는 20세기의 초강대국 미국처럼 말이다. 그러한 그의 탐욕과 광기는 결국 폭력을 부르고, 석유와 같이 검붉은 피가 서서히 스크린을 적신다.


석유를 향한 열망은 20세기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을 만들었다



2. 20세기를 만든 석유


석유는 20세기를 만들었다. 헨리 포드의 자동차, 일본의 진주만 공습, 세계의 화약고이자 미 항모전단의 거점이 된 된 중동, 소련의 몰락과 러시아의 부상. 석유는 20세기 전쟁과 경제, 지정학 리스크를 분출시키는 가장 중요한 연료였다. 그리고 약 100년 후, 기후 위기와 팬데믹 속에서 인류는 등 떠밀리듯이 석유를 버리고 새로운 에너지 질서를 구축해야 할 처지가 됐다.


급격한 전환은 필연적인 위험을 수반한다. 2021년부터 이어진 에너지 가격의 급등과 수급의 혼란은 인류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겪게 될 '그린 인플레이션'의 예고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위험하고 알 수 없는 일은 이러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전환이 너무 느리게 진행되거나, 아니면 애초에 우리 인류가 '탄소 중립'이라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3. 알 수 없는 지도


<뉴 맵>은 석유라는 에너지 자원에 대한 욕망이 어떻게 20세기 세계 역사를 이끌어 왔는지를 통찰한 퓰리처상 수상작 <황금의 샘>의 저자 대니얼 예긴이 2020년 팬데믹이 닥친 이후 출간한 책이다. 미국을 다시 세계 에너지 초강대국으로 만든 셰일 혁명의 영향과 에너지와 자원을 무기로 한 중국과 러시아의 패권주의, 석유와 천연가스, 그리고 종교를 둘러싼 끊이지 않는 중동의 분쟁, 화석연료를 대체할 친환경 에너지의 부상과 이를 뒷받침할 기술혁명까지. 20세기의 역사를 거쳐 현재 진행 중인 세상의 변화를 에너지라는 렌즈로 쥐락펴락 조감하는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에너지와 지정학으로 다시 그린 새로운 세계 지도'라 할 만하다.  


하지만 에너지 전문가로 명성이 높은 저자 본인도 솔직히 고백한다. "그 지도가 우리에게 쭉 뻗고 변하지 않는 길만을 알려주리란 보장은 없다"라고 말이다. 저자는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변화는 또 일어날 테고, 그에 따라 불가피하게 새로운 지도가 그려지며 경로 또한 바뀔 것"이며, 그 누가 셰일 혁명이나 2008년 금융위기, ‘아랍의 봄’과 2011년 후쿠시마 사고, 전기차의 대중화나 태양광 발전 비용의 하락, 코로나19의 유행, 미국 민주주의를 뒤흔든 2020년의 폭동과 시위를 예측할 수 있었는지를 묻는다. 21세기 인류는 더 복잡하게, 다층적으로 3D 맵핑된 에너지와 지정학 지도를 들고 조심스레 내일을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4. <뉴 맵> 이후 반년


국내 출간 이후 약 반년이 흐른 오늘(2022년 1월 20일), 미완성된 지도를 그려본다는 생각으로 <뉴 맵>의 전망 이후 앞으로 닥칠 에너지 리스크와 지정학적 요소를 짚어본다.


1) 미국


석유 생산량 1위의 에너지 초강대국. 하지만 인플레이션이라는 유령이 바이든과 연준을 고민에 빠지게 한다. 전임자 트럼프는 유가가 갤런당 3달러를 넘으면 어김없이 OPEC을 압박했다. 하지만 떠나갈 기미가 없는 팬데믹과 석유 산업에 대한 자본의 회의적인 시각은 추가 증산을 어렵게 만든다. 트럼프와 다르게 바이든은 기후 위기에 대응하고 탄소 중립을 선도하는 미국의 리더십으로 세계를 이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에 대한 자국민의 불만, 그리고 다가오는 중간 선거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 설마 싶은 트럼프의 복귀 시나리오는 바이든으로 하여금 다음 세대가 겪어야 할 2050년 보다 당장 2022년을 위한 선택을 하게 할지도 모른다.


2) 중국-러시아


이데올로기가 아닌 자국 중심의 자원 안보와 부족주의로 신냉전 구도가 가시화되는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파트너십을 보이는 중국과 러시아. 석탄 생산량 1위인 중국과 천연가스 생산량 1위인 러시아 협력은 '일대일로'와 '제정 러시아의 부활'이라는 동상이몽을 실현시키기 위해 더욱 공고해질 것이 예상된다. 


우크라이나를 두고 거침없이 호전성을 드러내는 푸틴 앞에서 급등한 에너지 가격에 전전긍긍하며 눈치만 보고 있는 유럽의 신세는 처량하다. 희토류와 리튬 같은 친환경 시대의 필수재를 무기로 삼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 개도국에 대한 막대한 빚의 외교를 펼치고 있는 시진핑은 자국의 경제성장률 둔화와 장기 집권에 대한 내부의 불만을 푸틴의 뒤를 따라 외부로 표출시켜 버릴지도 모른다.  


인류는 역사를 통해 분명 많은 것을 배우고 개선해 왔다. 하지만 자국과 힘의 이해관계 앞에서 인류는 동물 뼈와 석기를 휘두르던 부족사회로 순식간에 퇴화해 버릴 수도 있다.


3)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안보 사이


2014년 급락한 이후 국제 유가가 7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아 90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K-방산을 들고 방문한 아랍에미리트는 석유 저장 시설이 예멘 반군의 드론 공격을 받았고, 이라크에서 터키로 가는 송유관의 폭발 소식도 전해진다. 석유 피크-아웃 전망이 무색하게 중동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분쟁 지역이다. 거기다 셰일 가스 기업의 신규 투자는 멈춰져 있고, OPEC의 원유 증산은 더디며, 지정학적으로 불안한 리비아, 카자흐스탄은 공급 차질을 빚고 있다.


석유 시장의 혼돈 속에서도 혹자는 에너지 전환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지역에서만 나는 특정 에너지 자원에 과도하게 의존하며 힘 싸움을 벌이던 국제 질서 자체가 문제의 근원이라고 진단한다. 지리적으로, 기술적으로,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보다 다양하게 공급될 수 있는 시장친화적인 에너지원의 등장으로 인류가 20세기 석유를 둘러싸고 겪었던 갈등을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버리고, 더 이상 뜨거워지지 않는 지구의 새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런 기대가 현실화되면 인류는 몇몇 거대 플레이어들에 의해 좌우되는 불안정성에서 벗어난 새로운 에너지 시스템을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전과 그린 택소노미를 둘러싼 유럽 내부의 의견 충돌, 독재 기반의 중국과 러시아가 갖는 에너지 시장에서의 영향력 강화, 석유 수요가 감소됨에 따른 산유국들의 불안감, 탄소 저감과 인플레이션 사이 딜레마에 빠진 미국의 초조함은 새로운 에너지 질서로의 전환이 정말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견하게 한다. 과연 인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5. There will be blood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마지막. 늙고, 홀로 남은 다니엘 플레인뷰는 자신의 텅 빈 저택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솟구치는 석유처럼 흐르는 피를 바라보며 지친 표정으로 외친다.


"I'm finished!"


돈과 성공을 움켜쥐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은 파국이 미래의 인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인류가 맞이할 파국이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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