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마음이 머무는 곳들 #02
인생 맛집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세요!
인생 맛집을 딱 한 군데를 꼽는 것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아직 메뉴를 고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어떤 장르적 취향을 갖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음악 추천을 해달라고 할 때처럼 당혹스럽고, 친구가 '너는 나랑 제일 친하잖아' 하면 또 다른 제일 친한 친구가 떠올라 머뭇거릴 때처럼 미안해진다. 이 음식은 여기가 인생 맛집, 어떤 동네를 가면 그 음식을 먹어라 하는 이야기는 할 수 있지만 인생 맛집 단 한 군데만 고르라고 하면 다른 장르의 인생 맛집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는 많은 인생 맛집들 중 식사 자체가 어떤 문화적 충격이 되어 가장 인상 깊었던 자양동의 '송림식당'을 소개한다.
소개에 앞서 고백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송림식당에 관한 내 기억에는 여자친구와의 추억이 한 국자 듬뿍 부어져 있다는 점이다. 허나 대부분의 인생 식당이란 자고로 같이 먹은 사람과의 기억에 큰 신세를 지고 있으니 너무 편견을 갖고 읽지는 말아 주길 부탁한다. 여자친구와 옥상에 타프를 깔고 누워 밤새 떠들었던 늦은 여름날 새벽, 너무 출출해져 건대 쪽을 향하다 자양번영로 기사식당 골목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있는 4층짜리 식당을 만났다. 가본 적은 없지만 좀 유명한 기사식당인 것 같다는 설명을 듣고 가보기로 한 송림식당은 먼저 규모부터 압도적이었다. 서울 내 기사식당 중 최대 규모인 300석에, 건물 옆에는 50여 대 주차가 가능한 기계식 주차타워가 있었다. 입장 후의 풍경은 더욱 놀랍다. 손님의 셀프 코너인지 식당 측의 편의를 위한 전진형 테이블인지 알 수 없는 음식이 놓인 테이블이 식당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새벽인데도 그 양쪽으로 야간 주행을 마친 기사들은 반주를, 아침을 준비하는 기사들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규모와 모두가 베테랑인 듯한 분위기에 뉴비로서 약간 위축되려는 찰나, 돼지불백 8000, 해장국 6500, 된장찌개 6500, 김치찌개 6500이 적힌 익숙한 메뉴판에 마음을 놓는다. 고민 끝에 돼지불백과 해장국을 시키니, 뉴비에 대한 따듯한 연민에 시크한 조소가 살짝 묻은, 많이 말해 본 듯한 대사가 날아온다. '불백 드시면 해장국 드셔도 되는데 그렇게 드려요?'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불백을 먹으면 해장국을 먹어도 된다는 말은 불백을 먹으면 해장국도 나온다는 말과는 다르다. 그렇다. 불백을 시키면 해장국은 앞서 언급한 '식당을 가로지르는 테이블'에서 직접 떠서 무한리필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아아, 1000원도 2000원도 아닌 1500원의 차이는 무려 무한리필의 행복을 누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엄청난 차이였던 것이다. 그제야 깨달음을 얻고 불백 2인분을 시킨다. 다음에는 꼭 된장찌개를 먹어보기로 약속하면서... 놀라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불백을 자리에서 직접 조리하는 데로 이어진다. 가스형 고기 불판이 끼워진 테이블에서 우리는 팬 위에다 불백을 굽는다. 옆 테이블을 슬쩍 보면 밥을 이미 거기에 볶아 먹는다. 다들 그렇게 먹는가 보다 하고 눈치껏 밥을 비벼 본다. 새벽을 지새워 출출해진 입에 닿는 고기의 자글자글한 질감과 잘 지은 밥알의 흩어짐이 황홀하다. 선지 해장국을 두 그릇 듬뿍 떠 담아서 또 입에 넣는다. 무한리필과 이미 조리되었다는 악조건 속에서도 그 맛은 충분히 훌륭하다. 그렇다고 찬이 없느냐? 각각의 매력을 가진 각종 찬과 해장국과는 별도의 동치미, 거기에 쌈 채소는 덤이다.
허겁지겁 주워 담다 보니 한 그릇이 뚝딱 비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맛의 행복이렸다 하며 더 못한 식사가 아쉬운 마음으로 계산대로 향하는 순간, 옆자리의 베테랑 기사는 쌈과 반찬을 전부 팬 위로 쏟아붓는다. '아뿔싸, 뉴비는 아직 한참 멀었구나! 다음에는 기필코...'를 되뇌면서 계산을 마친다. 나서는 길에 1인 1요구르트, 주먹에 꼭 쥐여진다. 식당 주인에게는 계산된 아쉬움이고 계산된 위로이겠지. 분명 8천 원짜리 메뉴 하나를 시켰는데 코스요리를 먹은 듯 온 미각이 행복하다. 아직 두 번밖에 방문하지 못했으나, 충격이 강렬해 인생 식당 선두에 우뚝 섰다. 다만 이 식당에서 불백이 가진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 앞에 감히 된장찌개에 바친 약속은 아직 지키지 못했다.
건축 회사를 다닐 때는 업무에 쫓겨 회사 근처의 뻔한 식당들만 다녔다. 뻔한 식당들의 조건은 세 가지다. 첫째 점심시간에 줄서지 않고 바로 가서 먹을 수 있을 것. 둘째, 가격이 통상적인 점심 식비일 것. 셋째, 회사와 가까울 것. 그래서 나에게 평일 점심은 연료이자 여물로써 적당히 맛있고 저렴하면 그만인 것이 되었고 주말 저녁에 오히려 힘을 싣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새 회사는 여초 회사인 영향도 있는 것 같은데 점심에 약간의 대기시간은 감안하더라도, 좀 멀더라도, 좀 비싸더라도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는 것을 꽤 즐기는 분들이 많다. 오랜만에 점심을 맛있는 것을 먹다 보니 저녁을 좀 가볍게 먹게 되기도 하고 근무 사이에 맛있는 식사라는 즐길 거리가 하나 생긴 것 같아 산뜻하니 나쁘지 않다. 무엇이든 장단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어쩐지 나는 점심을 소홀히 하면서부터 맛집에 대한 욕심이 다소 줄어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먹을 것 자체에 관한 관심이 높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에는 '대명이의 맛따라 멋따라'의 김대명 배우 분같은 사람이 1-20명 중 1명 정도 있어서, 그 분을 따라가면 맛있는 걸 먹게 되는 정도의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소위 '맛집'이라는 단어가 유행을 하면서 모든 사람이 맛있는 것을 먹으러 찾아다니고 맛집에 2-3시간씩 줄을 서고, 어플을 통해 실시간으로 예약하는 전에 없던 해괴한 장면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최근의 두쫀쿠 유행을 끝으로 나는 거기에 신물이 나버렸다.
나도 한때 지도 어플에 맛집을 저장해 놓고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새로운 건물이나 안 가본 미술관의 전시를 보러 갈 때 그 근처에 맛집이 있다면 거기를 찾아가곤 했다. 그것은 분명 즐거움이었다. 나는 앞서 서술한 송림식당처럼 오랫동안 운영되어 음식 제조 공정, 플레이팅과 서빙, 음식의 맛과 서비스의 퀄리티 같은 것이 총체적으로 증명된 노포들을 좋아했다. 그런데 맛집이라는 것이 일상화되고 당연한 것이 되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맛보고 경험해야 하는 것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조장되면서 이 모든 것이 나의 취향이나 욕구가 아닌 타의로 주입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날 문득 지도 어플을 켰을 때 서울을 빼곡히 덮고 있는 별표들을 보면서 내가 잘못해 왔으며 고장났다는 사실을 인지해버렸다. 무엇이든지 타의에 의해 주입된 취향을 경계하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상당히 불편한 일이지만, 궁극적으로 삶 전체로 봤을 때는 가치있는 일이다. 야식은 맛있지만 참고 밤에 스트레칭과 조깅을 하는 마음과 같이, 과연 내가 좋아하는 것이 진짜 내가 좋아하는 일인지 살피는 것은 시간과 감정의 낭비가 아닌,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에는 그 식당이 맛집에 대한 나의 이데아라고 할만한 식당은 꼭 떠오르지는 않는다. 독립하고 동거하며 집에서 밥을 많이 만들어 먹게 된 요즘은 오히려 누구와 함께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같이 맛집이 넘쳐나는 시대에 음식이 맛이 없어서는 곤란하겠지만, 진짜 맛집이란 같이 사는 동거인이든, 나의 가족이든, 친구들과 동료들이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는 그 공간인 것 같다. 흑백요리사의 시대에 무슨 바보같은 뒤쳐지는 소리냐고 하면 그렇게 당당히 앞에 나가 주장하고 싶은 이야기까지는 아니니 너무 나무라지 말아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