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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늘 Mar 24. 2022

<마리와 나>(2020) 조은길

영화광 꼬마가 보여주는 쿠엔틴 영화에 대한 오마주

[씨네리와인드|이하늘 리뷰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부문에서 상영됐던 <마리와 나>, 전주국제영화제는 5월 8일자로 막을 내렸다. 전주에 직접 방문하지 못해서 아쉬움은 크게 남지만, 다음의 전주국제영화제 방문을 노려본다. <마리와 나>, 개봉 전부터 재미있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던 작품이다. 그래서 전주국제영화제를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웨이브를 통해 만나보게 되었다. 제목의 언어적 유희, 마리와 나, 마리화나. 영화의 유머코드가 제목에서부터 물씬 풍겨왔다. 이 작품을 보지 않으신 분들이 있다면 꼭 한번 보시기를 바란다. 이 영화의 감독인 조은길 감독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될 것이다.


▲ 마리와 나     ©JEONJU IFF



카우보이,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영화의 오프닝은 차를 탄 두 남자의 뒷모습으로 시작된다. 후진을 하는 뒷모습에 뜬 타이틀의 폰트는 어디선가 본 듯 몹시도 익숙하다. 남자의 카우보이 굽이 있는 신발, 손에 맥도날드 봉지와 검은 정장을 입은 ‘나’와 카우보이 복장을 입은 ‘마리’. 튀는 옷차림이지만 프레임에 담긴 그들의 공간에서는 잘 어울린다. 한국의 도심 한복판, 어디도 텍사스의 사막 같은 구석은 없다. 하지만 주인공인 '나'와 '마리'가 발을 내딛는 순간 마치 이 곳이 텍사스의 한복판처럼 변화하게 되었다.             

         

▲ 마리와 나   ©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텍사스, 그곳은 바로 서부극이 시작된 발화지이다. 서부극 이야기의 시초는 사실 미국에 자리잡은 총잡이에 관한 이야기다. 미국의 영토와도 연관이 있는데, 미국이 처음 건국할때 인디언의 땅이었던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그 이후에 시간이 지르며 미국은 전 세계 중에서 가장 힘이 있는 국가로 인식이 되었다. 그래서 서부극의 시작은 매번 누군가가 한 마을에 나타나서 악당들을 해결해준다는 시작에서부터 영화의 오프닝이 시작된다.  


텍사스의 황야를 말을 타고 가로지르는 장면, 1930-40년대 미국 서부극 영화를 보면 흔히 알 수 있다. 사실 1930-40년대 서부극은 미국의 정통 서부극으로 <역마차>(1939)같은 작품을 보면 그 특징을 느끼게 된다. 시간이 흘러 변화가 된 서부극을 보고 싶다면 세르지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 <석양의 무법자>(1965)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통해서도 알수 있다. 미국의 우월한 영웅주의 서사를 다루는 정통 서부극은 시대를 거쳐 변형되어 다양하게 다뤄졌다. 그 중에서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장고: 분노의 추격자>(2012)에서 시대적인 배경과 함께 총잡이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서부극은 그렇게 다양한 변주를 해왔다.


<마리와 나> 속에서는 한국 정서와는 조금은 거리가 있는 서부의 캐릭터를 '마리'라는 캐릭터에게 입혀 보여준다. 물론 한국에서도 만주서부극은 익히 선보여진 바 있다. 바로 김지운 감독의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 놈>(2008)이다. 만주의 한복판을 텍사스의 사막과 일치시켜 그 안에서 각각의 캐릭터를 보여준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작품의 스파게티 웨스턴과 결을 같이 한다. 아마도 김지운 감독의 어린 시절 보았던 작품에 대한 오마주일 것이다. <마리와 나> 또한 서부극에 대해서 드러내긴 하지만 완전히 서부극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한 분위기를 풍길 뿐이다. '마리'도 그 시절에 대한 향기를 풍긴다.  



왜 제목이 <마리와 나>인가?

그렇다. 사실 쿠엔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먼길을 돌아왔다. 이 영화는 쿠엔틴 타란티노에 대한 찬양과 오마주를 통해 한국식 b급 영화를 만들어냈다. 주인공인 ‘나’는 ‘마리’와 함께 마약 판매, 즉 마리화나를 거래하는 판매자다. 브로콜리 농장을 한다는 명목 하에 속이며 거래하는데 친구인 브래드의 등장으로 소동이 일어나는 이야기다. ‘브래드’가 집으로 돌아오는 와중에 경찰을 만나고 어떠한 실수를 저질러 총격전?이 일어난다. 이야기의 내러티브 구조를 살펴보면 이야기의 중간중간에 기억처럼 나타나는 이야기들이 순차적인 구조를 지닌 것이 아니라 비 순차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련의 예시로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면인 ‘브래드’가 마약이라는 생각에 세제를 코로 들이마시는 장면을 보여줄 때이다. 이 장면은 바로 '브레드'가 세제를 마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고 플래쉬백을 통해서 이야기의 구조를 깨면서 그가 코로 마신 것이 세제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간의 순차적인 흐름이 아닌 과거로 역행하거나 미래를 먼저 보여주는 방식은 어떠한 영화와 몹시 닮아 있다.                     


▲ 마리와 나     ©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마리와 나>의 원문 제목이다. 어떤 영화와 제목이 무척이나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이다. 마치 ‘나’의 복장은 <펄프픽션>(1994)속 빈센트의 복장과 성격이 비슷하고 ‘마리’는 <장고:분노의 추격자>(2012) 속 장고의 복장과 상당히 닮아있다. <펄프픽션>(1994)의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하면 이 이야기도 뒷골목의 건달들의 세계에서 금괴가 있는 가방을 가지고 가다가 생기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의 비순차적인 이야기다. 캐릭터가 여러 명 나오는데 그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각기 다른 시간에 진행이 된다. <마리와 나> 속에서는 '마리화나'가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하면서 진행이 되지만, <펄프픽션>(1994)속에서는 '금괴가 들어있는 돈가방'이 중요 키워드로 등장하면서 그와 둘러싼 오해와 깨닫음이 생겨난다.

 

쿠엔틴의 작품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우연함이라는 것은 사실 인생을 담고 있다. 인생에서는 우리는 다양한 우연함과 예측하지 못하는 것들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쿠엔틴의 영화인 <킬빌>에서의 우마 서먼도 결혼식장에서 총을 맞고 킬러로 성장하고, <헤이트풀8>에서도 산장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 인생은 이렇게 예측하기 어려운 것들의 연속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참으로 재미있는 것이다. <마리와 나>의 엔딩부에 가면 그들의 업소, 마리화나 업소에 우연히 '브레드'가 놓고 간 휴대폰을 돌려주려다가 경찰이 방문하게 되고, 그 안에서 총을 맞는 사건도 발생한다. 거시적으로 보면 인생의 큰 사건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지만 미시적으로 보게 되면 일련의 연결점들이 있고 그것들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틈에서 일어난다.                      


▲ 펄프픽션   © miramax films


<마리와 나> 속의 '마리'는 '브레드'가 세제를 코로 들이마시는 우연성의 사건을 겪어 죽을 뻔함을 눈앞에서 봄으로써 차에 탄 '나'와 '브레드'에게 마리화나를 파는 일을 그만두고, 이제 이 삶을 청산하겠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마치 <펄르픽션>(1994) 엔딩부의 오마주처럼 보인다. '쥴스'가 신의 섭리를 느끼며 이제 건달 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말하는 부분과 일치한다. 사실 갑작스러운 전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원래 삶이란 것은 인생의 전환포인트는 갑자기 찾아온다. 인생이 꼭 기승전결이 나눠져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은 그러한 순간들의 결합으로 하나의 '나'라는 스토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마리와 나> 속의 일련의 사건들은 어이없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쿠엔틴은 b급 영화의 대가이다. 얽힌 사건들 속에 일련의 캐릭터성을 가진 주인공들의 배치, 욕망을 가진 인물의 행동으로 인한 사건의 재발. 그의 작품들은 신랄하면서도 통쾌하다. 마구 나오는 피와 총성. 그로 하여금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몹시도 영화적이다.  



감독은 왜 쿠엔틴에 대한 찬양을 했는가? 

<마리와 나>의 감독은 왜 쿠엔틴에 관한 찬양을 했는가에 대한 질문은 내가 쉽게 대답을 할수는 없지만 내가 어린시절 봐왔고 영화에 대한 꿈을 꾸었던 영화에 대한 선물, 찬양일것이다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내가 영화를 보면서 했던 질문들, 영화를 2-3번 이상 돌려보면서 ‘나는 저런 감독이 될거야’라고 했던 것에 대한 재현이라는 생각이 든다.쿠엔틴 타란티노 역시 어린시절에 비디오가게에 가서 다양한 영화들을 보면서 영화에 대한 견문이 넓어졌다고 한다. 그의 영화를 보면 알수 있지만 b급의 감성이 담겨있고, 여러 감독들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작품들의 오마주가 드러나있다. 그가 영화를 사랑하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 마리와 나     ©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마리와 나> 속에서 나오는 경찰의 총에 맞는 ‘나’와 코미디적인 요소와 그가 손에 들고 있는 타란티노 잡지. 어린 시절 내가 본 거장의 영화들의 재현. 감독은 어쩌면 쿠엔틴에 대한 오마주로서 자신의 영화에 대한 꿈에 대한 감사함을 표시한 게 아닐까? 누구나 처음에 영화를 접했을 때의 그 충격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한 순간의 영화가 인생의 한 페이지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영화를 내가 사랑하게 된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사실 사랑이라는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며드는 것이 아닐까. <마리와 나>가 대단한 이유는 쿠엔틴에 대한 찬양과 오마주도 있겠지만 이것을 감독이 자신만의 영역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높은 박수를 남긴다. 사실 자신이 존경하는 감독의 영화를 오마주한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조은길 감독이 만들어놓은 세계에 흠뻑 빠져버렸다. 누가 아나? 조은길 감독의 <마리와 나>를 보고 오마주 하는 다른 감독이 나오게 될지?

여러분의 영화는 무엇인가?


여러분의 마음 속의 깊은 곳에 사랑하는 영화, 오마주하고 싶은 영화들이 숨겨져 있지 않은가?



*씨네리와인드에서 작성된 기사입니다.



http://www.cine-rewind.com/sub_read.html?uid=4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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