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하늘 Mar 13. 2022

<톰 보이>(2011) 셀린 시아마

이름이 부여한 영역

▲ '톰보이'  © ㈜영화특별시SMC


[씨네리와인드|이하늘 리뷰어] 바람에 흩날리는 짧은 뒷머리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으로 인해 번지는 머리카락의 갈색빛. 숲 속의 초록빛이 포커스 아웃되어 보이고 중간 중간에 들어오는 빛이 아이의 옆모습에 닿는다. 누군가의 시선처럼 지나치는 나무와 해를 지나치는 모습과 그 따스함에 손가락을 내밀어 느끼는 아이의 솜털과 손가락을 펴본다. 이내 빛 번짐이 된 하늘. 그 뒤에 눈을 감은 짧은 머리의 아이 바스트 얼굴이 보이며 차를 타고 가는 그 아이는 어딘가를 이동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고 빛이 너무 밝아서 한번에 눈을 뜨기 힘들어한다. 아버지의 “안무서워?”라는 대사 이후에 뜬 영화 「톰보이」(2020)의 빨간색 파랑색 타이틀. 무서움이란 어떤 대상에 대한 무서움을 다루는 것일까? <톰보이>(2020)는 아이가 바라보고 느끼는 시선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 

여동생과의 놀이 뒤에 흰색 철장 너머로 모여 있는 남자아이들을 보는 ‘아이’. 아이’는 옆집 소녀인 리사를 만나고 자신을 소년으로 설명한다. 자신의 이름은 ‘미카엘’이라고. 아이의 이름은 이때 처음 등장한다. 아이의 중성적인 모습은 아이의 소개로 남자아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리사와 함께 숲속에서 아이들과 놀게 되는 미카엘의 표정은 오프닝의 아버지와 핸들을 잡고 운전을 할 때의 순수함과 설레임과 동일해 보인다. 하지만 이내 다음 장면에 붙은 컷에서 ‘미카엘’은 소년이 아닌 소녀임이 드러난다. 여동생과 함께 목욕을 하는 장면에서 신체적인 등장을 통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미카엘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진짜 ‘로레’는 자신의 몸을 수건으로 가려버린다. 오프 스크린으로 들리는 엄마와 동생의 사운드와 자신의 몸을 닦는 ‘로레’, 그 모습은 마치 부정하고 싶은 자신의 모습처럼 홀로 남겨져있다. 두 컷의 마주함은 ‘클레쇼프의 몽타주’처럼 a의 남자아이들과 놀고 ‘미카엘’로 신났던 아이가 b의 자신의 신체적인 여성성으로 인해 자신의 결핍을 숨기고 싶어하는 ‘로레’ 자신의 모습으로 드러나며 컷이 충돌한다. 때문에 평범한 목욕 장면이 아닌 아이들과 놀았던 그룹샷과 홀로 남겨진 ‘로레’의 모습이 더 부각이 되는 것이다. 감독은 이러한 컷 편집의 방식을 의도적으로 이용하며, 캐릭터의 감정을 묘사한다.


▲ '톰보이' 스틸컷. © ㈜영화특별시SMC



가짜 이름이 부여한 새로운 영역

‘로레’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다시 ‘미카엘’로 아이들을 대한다. 아이들은 ‘축구’를 하고, ‘로레’는 남자아이라는 새로운 탈을 쓴다. 그것이 금방 들킬까봐 불안해하면서도 그녀는 방학동안의 설레임을 느낀다. 축구는 팀플레이로 11명이 팀을 이루어 공을 주고받는 연결이 이어지고 그 안에 소속되려고 하는 영역 스포츠이며, 그 스포츠는 남자들의 전유물이다. ‘garçon’(프랑스어 남자아이)과 ‘femme’(프랑스어 여자아이)를 뜻하는 명칭으로 구역이 나뉘어져있는 것처럼. 또한 ‘로레’가 축구를 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마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의 상승구조처럼 지배계층의 생활 속에 침투하려는 피지배계층의 수직 피라미드처럼 보인다. ‘로레’에게는 축구 또한 하나의 올라가야 하는 계단인 것이다. 발각이 되면 기득권자인 남자들에 의해서 버림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모방하면서 그들의 습관을 취득하려고 한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이러한 아이들의 모습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형식은 오히려 아이들은 순수악 같은 느낌을 풍기게 만든다. 축구를 하고 나서 이어지는 에피소드는 수영장이다. 대지위의 공간에서 물로 들어갈 때 ‘로레’에게 어쩔 수 없이 신체적인 결함이 부각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때문에 ‘로레’는 수영복 안에 남자아이들의 상징인 ‘성기’를 창조해 붙인다. ‘신’은 우리를 창조 해낼 때 다른 성별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절대적인 신 앞에서 우리는 하나의 피조물일 뿐이다. 거시적인 관점의 창조는 몹시 아름다워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피조물들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이름도 마찬가지다. 태어났을 때 우리는 이미 누군가로 이름이 분류되어 있다. ‘로레’라는 이름이 태초부터 부여된 것처럼. 또한 아담과 이브의 모습처럼 이미 ‘로레’는 이브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보는 자신의 신체의 결부는 하나의 결핍이다. 감독은 ‘로레’를 통해 신체적인 결핍을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내면 된다는 하나의 독특한 시각을 만들어낸다. 때문에 이 영화는 직유의 화법을 지니고 있다. ‘로레’는 성기를 만들어 자신이 창조해낸 하나의 인물 ‘미카엘’을 빚어낸다. 마치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을 만들어낸 것처럼 ‘로레’는 자신의 결핍을 클레이로 빚어낸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여인처럼 ‘미카엘’의 존재는 불완전하다. 수영장에서의 물놀이는 ‘로레’가 신체적인 다른 점을 가지고 있어도 노는 것에 구분이나 영역이 없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미카엘’의 존재는 점점 석고의 가루가 되어 부서지기 시작한다.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여동생을 통해 자신이 ‘미카엘’이라는 남자아이로 속이고 있다는 것이 발각이 되고 여동생을 친구들이 노는 공간에 데려가게 된다. 이때의 관객들은 여동생이 ‘로레’의 존재를 이야기하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오히려 여동생은 ‘로레’의 편에서 순수하게 언니의 피조물을 응원한다. 이 영화에서 ‘여동생’은 정립되지 않은 시선이다. 아직 정의되지 않았고 때문에 편견이 없이 그녀를 받아들인다. 그저 놀이를 하는 것에 차이를 둘 뿐 언니를 ‘로레’, ‘미카엘’이라는 두 명의 인물로 이해해준다. 이 과정 속에서 카메라는 여동생의 표정을 타이트하게 주목한다. 언니가 ‘미카엘’로 행동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모습들은 감정의 변화를 통해 과연 어린아이의 정의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흔히 어리다.라는 영역은 자신의 의사표현 쉽게 정립되어 있지 않은 어른이 되기 전의 단계라고 하지만 사실 어린아이들은 절대적으로 순수하지도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일뿐. 오히려 이 영화에서는 어른들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감독이 어린아이를 그리는 독특한 시선으로 인해 ‘로레’의 감정이 길지 않은 1시간 반 가량 되는 러닝타임 안에서도 전달되게 만든다.


▲ '톰보이' 스틸컷.   © ㈜영화특별시SMC



산산조각이 나버린 가면

‘로레’가 만든 ‘미카엘’은 이제 산산조각이 난다. 자신의 동생을 괴롭힌 친구와 싸움을 하다가 엄마에게 ‘미카엘’이 들키게 되고, 친구에게 사과를 하려고 파란 원피스와 함께 ‘로레’를 들킨다. 그녀는 낙심한다. 친구들에게 들킨 것 뿐 아니라 자신을 좋아해주는 여자친구인 리사에게 들킨 것 또한. 리사의 앞에서 파란 원피스를 입었던 ‘로레’는 도망쳐 숲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로레’는 나무 앞에 쭈그려 앉아 있고 카메라는 그녀를 바스트샷 정도로 부여주다가 그녀의 시선에 따라 움직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여준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빛과 함께 카메라는 다시 내려가 파란 원피스를 벗어 나무 위에 걸쳐둔 모습과 멀리 걸어가는 로레를 보여준다. ‘빛’이 얼굴에 닿고 공간 안에 퍼져있는 것은 영화 속의 주요한 포인트이다. 빛은 한 공간 안에 머무르기도 하지만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고정적이지 않은 성격을 지닌다. 또한 영화의 오프닝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나무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유동적인 존재다. 아직 ‘로레’는 자신의 성정체성이 완벽하게 확립되지 않은 어린아이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부딪히며 상처를 입고 비를 맞는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바람이 불어도 꺾이지 않는 힘이 생겼다. 극중에서 ‘로레’의 엄마는 악당이다. 또한 아이들도 악당이 된다. 어린아이들은 순수함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이미지는 상반된 이미지의 철저한 잔인함을 보인다. 아이들은 ‘로레’에게 옷을 벗어서 증명하라고 한다. 마치 사형대 위에 올려놓고 심판을 하는 배심원들의 이미지과 동일하게 그려진다. 아이들이 순수하게 묻는 행위는 악으로 다가온다. 아이들은 결코 순수하지 않다. 이는 학습되는 과정 속에서 여자와 남자의 영역은 나뉘어져야 함을 배웠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흡수율이 빠르다. 그래서 가장 순수하기도 순수하지 않게 다가오기도 한다. 때문에 ‘로레’는 ‘미카엘’을 버려야 했다. 


영화는 단편적인 사건의 여름방학이 끝나면서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 단편적인 방학은 ‘로레’의 인생을 바꾸게 될 것이다. 영화는 잔인하게도 ‘로레’의 남동생이 태어난 모습까지 보여준다. 자신의 결핍을 갖지 않고 태어난 남동생. 하지만 ‘로레’에게는 자신의 옆을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다. 리사는 이렇게 다시 묻는다. “너는 이름이 뭐야?” 지금까지 알았던 ‘미카엘’이 아닌 ‘로레’를 궁금해한다. “로레야” 로레는 신체적인 모습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닌 그저 한 개인으로 구분되며, 형용사가 붙는 무엇을 좋아하는 로레가 될 것이다. 



*씨네리와인드에서 작성된 기사입니다. 



http://www.cine-rewind.com/sub_read.html?uid=5121


작가의 이전글 <뮬란>(1998) 토니 밴크로프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