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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늘 Mar 12. 2022

<빅 피쉬>(2003) 팀 버튼

우리의 삶은 동화적인가요?

[씨네리와인드|이하늘 리뷰어] 팀 버튼 감독의 영화 <빅피쉬>(2003)는, 최근에 극장을 통해 다시금 재개봉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영화 산업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재개봉하는 영화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사실 재개봉된 영화의 셀레임은 처음 영화를 마주했던 묘하게 첫인상과 다르다. 그 두 번째 인상에 대한 묘미 때문에 재개봉한 영화를 보러 극장에 자주 가고는 한다. 어린 시절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의문투성이였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의문들이 아직도 존재하는지 나는 다시 극장에 발을 들어섰다. 극장의 어두움과 그 안의 적막함, 커다란 스크린의 압도적인 크기, 떠다니는 먼지와 관객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극장의 한켠에 켜져 있던 적은 빛마저, 어둠이 집어삼키면 관객들이 의자를 고쳐안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진정된다. 흰 스크린 화면에는 소니픽쳐스의 로고 횃불을 든 여자가 등장한다. 극장 안은 이제 스크린에서 나오는 빛만이 그 안을 감싸 안을 뿐이다. 관객들은 이제 새로운 세계로 마법처럼 빨려들어간다.                     


▲ 빅피쉬     ©소니픽쳐스


에드워드 블룸의 진실 혹은 거짓  

<빅피쉬>(2003)는 마치 팀버튼 감독이 만든 한폭의 수채화로 만든 마법과 같다. 나이가 든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스토리를 메인플롯으로 두고 아버지의 젊은 시절 입장에서 풀어내는 이야기를 서브플롯으로 두고 있다. 때문에 이야기는 순차적인 시간의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 마치 큰 서랍장에 있는 책을 눈에 보이는대로 꺼내는듯한 느낌의 비순차적인 시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너무나 환상적이고 동화적이며,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부 믿지 않는다. 결혼한 아들이 자신의 자식이 태어나기 위해 기다리는 순간과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의 풀어내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는 생과 사의 굴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버지인 에드워드는 자신의 아들인 윌에게 자신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 자신의 태어남의 과정을 모험담처럼 풀어낸다. 그의 허풍이 가득한 입담에 관객들도 그의 삶이 거짓인지 진실인지에 대한 의문점을 갖는다. 마치 그의 삶은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을 법한 허구의 세계 같다는 인상을 준다. 에드워드가 일정한 나이가 되고, 자신이 살던 동네에서 벗어나서 갈림길을 선택하는 부분, 자신의 아내와 사랑에 빠져서 쟁취를 하게 된 이야기. 이러한 이야기들의 형식은 마치 단편적인 하나의 이솝우화를 듣는 듯한 이야기를 든다. 관객들은 이제 그의 이야기의 진위여부보다는 그 이야기를 하는 연유, 숨겨진 진실에 더 주목을 하게 된다. 에드워드가 지금의 자신의 아내인 산드라를 만나게 된 과정을 서술할때를 잘 지켜보면 서커스단에서 서로 처음 마주한 모습을 시간이 멈춘다는 문학적인 문체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영화 속에서는 정말 시간이 멈춘다. 거짓말이 아니냐고? 문장 그대로 영화 속에서는 에드워드를 제외한 사람들의 시간이 멈추고 산드라를 마주한다. 다시 시간은 거짓말처럼 다시 빨라지고 그 안에 홀로 남은 그는 그녀의 흔적을 찾는다. 영화는 이러한 방식으로 전개가 된다.

  


팀 버튼의 마법 같은 영화 세계관

이 영화의 감독, 팀 버튼의 영화의 세계관은 가히 동화적이고 환상적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2시간 30분 정도 시간 동안의 하나의 허구의 세계를 만드는 작업이라지만 팀버튼은 그 허구의 세계안에 다른 자신만의 상상력의 묘약을 떨어뜨린다. 마치 팀 버튼은 <해리포터> 속의 마법세계처럼 견고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문학적이다. 우리가 흔히 사랑을 하면 시간이 멈춘다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팀버튼은 그것을 거침없이 표현한다. <빅피쉬>를 제외하고도 그가 만든 작품 세계를 살펴보면 <찰리와 초콜릿 공장>(2005), <유령신부>(2005),<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등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그린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윌리 윙카 초콜릿 공장'에 가게 된 주인공 찰리 버켓과 다른 어린아이들과 어른들의 모습을 담는다. 혹은 <유령신부> 같은 경우에도 결혼이 두려운 신랑 빅터가 유령신부를 만나는 이야기를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결혼'이라는 흔히 우리의 이미지 속에 그려진 행복하고 축복을 해주는 이미지와는 상반되게 결혼을 앞둔 이의 두려움과 결혼을 앞두고 죽은 여자의 미스터리한 만남으로 팀버튼의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 혹은 동화로도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통해 '앨리스'가 회중시계를 들고 있는 토끼를 쫓아 만난 이상한 세계. 팀버튼이 그리는 영화 속의 세계는 현실과 맞닿아있지 않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RKO


하지만 여기서 팀버튼이 그리는 세계관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현실'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평범한 일상들이 현실인 걸까. 아니라면 팀버튼은 현실의 미시적이고 디테일한 미학적인 관점을 통해서 하나의 결이 다른 현실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들. 1985년 12월 28일, 영화의 최초의 탄생은 뤼미에르의 <열차의 도착>(1985)를 통해 처음 시작되었다. 뤼미에르 형제들은 사실 과학자로서 영화를 예술로서 접한 것이 아닌 기록물로서의 영화를 처음 만들어내었다. 그러한 영화의 시작은 처음에는 리얼리티, 사실을 그대로 담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영화에 하나의 스토리를 담고 이야기를 창조해내는 과정에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담는 것이 아닌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변주되었다. 이후의 조르주 멜리에스 감독의 <달세계여행>(1902)은 달에 가는 사람들의 여행을 표현해낸다. 이 영화는 14분 정도 되는 길이의 프랑스영화이다. 이 영화를 기점으로 영화는 환상주의를 담아내었다. 팀버튼은 사실주의의 영화의 사조를 따르지 않고 <달세계여행>과 같은 환상주의의 영화 사조를 따른다. 그가 그려내는 현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색다른 현실을 그려낸다.  



삶은 동화인가 

사실 우리의 삶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단편의 일련의 사건들로 구성된 것이지만 미시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았을 때, 동화적인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어떠한 나의 인생에서 색다른 선택을 함에 있어서 거시적으로 보면 그저 하나의 갈림길에서 다른 갈림길을 선택한 것이 되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서 삶의 도달 지점은 다르게 변화한다. 그렇기에 삶은 예측할 수 없는 재미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빅피쉬>는 '인생'에 관하여 하나의 질문점을 던진다. 생과 사란 무엇인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어떠한 마을. 신발을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걸어놓고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지상낙원의 파라다이스이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을 아무런 리스크 없이 쾌락만을 즐기면서 살아갈 수 없다. 에드워드는 그 마을을 방문하고는 단 하루만을 머무른다. 다시 길을 잘 알 수 없는 숲속으로 들어간다. 우리의 Life라는 것은 그러한 다침을 감수하고 성장해나가는 것이다. 그러한 선택들이 모여 자신의 가치관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이다. 평생을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있을 수만은 없다. 


어린 시절, 나는 동화책에 코를 파묻고 읽곤 했다. 그 결과 나는 눈이 나빠 안경을 써야 할 정도였지만 그 세계 안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늘 나는 의문이 들었다. 동화속의 주인공은 늘 자신의 팍팍한 순간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날까? 첫눈에 사랑에 빠져서 백마 탄 왕자님이 구제를 해주는 거지? 원래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걸까. 영화 <빅피쉬>에서는 같은 맥락으로 에드워드는 이러한 대사를 던진다.                      


▲ 빅피쉬     ©소니픽셔츠


"때로는 초라한 진실보다 환상적인 거짓이 더 나을 수도 있단다. 더구나 그것이 사랑에 의한 것이라면!" 

진실이라는 것은 고정된 이미 일어난 사건의 순수성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거짓이라는 것은 진실을 거스르는 왜곡된 내용이다. 이러한 초라한 진실과 환상적인 거짓이라는 불일치하는 단어들의 조합은 아이러니함을 자아낸다. 삶은 과연 무엇인가.  



생과 사의 굴레 

영화는 생과 사의 굴레에 있는 부자간의 이야기를 다룬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인 에드워드와 자신의 자식의 태어남을 기다리는 아들 윌은 서로의 다른 가치관 속에서 대립을 겪는다. 아버지는 자신의 입장에서 풀어내는 이야기를 아들에게 전달을 하지만 아들은 그것의 진실과 거짓에 집중한다. 아버지의 모험담 같은 이야기에 아버지의 진정한 삶을 알고자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한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에드워드의 장례식에서 윌은 아버지의 말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강물로 가서 큰 물고기가 되고 싶다는 에드워드의 이야기를 아버지의 죽음 직전 이야기로 풀어서 말해주는 윌. 그는 이제 아버지의 이야기, 삶에 대해서 인정하고 아버지 자체로서 이해한다. 이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될 윌의 연대 의식이며, 세대 간의 공감에 대한 이야기이다.                     


▲ 빅피쉬  © 소니픽쳐스


생은 살아내는 것, 그 순환 안에서 자신의 경로를 설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죽음은 그러한 생을 마무리하고 정리를 하는 것이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나온 어린 시절 에드워드가 본 자신의 죽음의 순간을 볼 수 있는 마녀의 모습을 통해서 죽음에 초연한 모습들은 삶을 대하는 굳건한 태도 또한 엿보인다. 에드워드는 다시금 자신은 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회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가 빅피쉬라는 말을 언급한다. 사실 물의 속성은 어머니의 양수로 삶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물이 부족하다고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삶의 생명력을 다함을 의미한다. 그러한 물로의 회귀는 삶의 반복되는 순환안에서 다른 생을 반복한다는 의미이며, 사실은 어쩌면 죽음이라는 것은 무서운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다시금 생을 살아갈 수 있기에. 


'빅피쉬'는 삶을 대하는 담대한 태도와 죽음앞에서 초연했던 한 남자의 모험담같은 이야기이자 어쩌면 우리가 삶을 살아가야 하는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팀버튼의 세계관안에서 동화적으로 풀어낸것 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환상적인 모습 안에서 우리는 메세지를 읽는다. 과연 그 남자의 삶은 어떠했던 것일까 모든 궁금증에 대한 의문들은 사실은 우리의 삶을 반영적으로 생각해보면 약간의 실마리가 풀린다. 삶의 동화같은 순간들, 사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삶의 모습을 알고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삶을 거시적으로 바라보아서 에드워드의 삶만이 환상적이고 동화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에 돋보기를 대보자. 그 작은 모험들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삶의 주인공이다. 여러분의 삶은 이미 충분히 동화적이다.  



*씨네리와인드에서 작성된 기사입니다.



http://www.cine-rewind.com/sub_read.html?uid=4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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