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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늘 Mar 12. 2022

<데드 돈 다이>(2019) 짐 자무쉬

우리는 좀비와 닮았을까?

▲ 데드 돈 다이(2019) 스틸컷  © kill the head


[씨네리와인드|이하늘 리뷰어] 2019년 개봉한 「데드 돈 다이」는 거장 짐 자무쉬 감독의 좀비 영화다. '짐 자무쉬 감독이 좀비 영화라니.' 그의 초기작부터 함께 해온 관객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의 좀비 영화는 다르다. 최근  좀비 영화를 하나의 영화 장르로 구분해서 칭해야 할 정도로 많은 좀비물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시리즈물 <워킹데드>와 <윔바디스>, <월드워Z>, 한국의 <킹덤>까지. 좀비를 다루는 작품들은 다양한 변주를 거쳐서 진화해왔다. 며칠 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킹덤> 시리즈의 외전 <킹덤 : 아신전>(2021) 또한 생사초의 유래와 함께 조선시대 속 좀비의 시작을 알리는 픽션이다. 그래서인지 좀비는 작품 속에서 각각 다양한 특징을 가진다. 우리가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을 할 때, 흔히 '좀비는 빠르다' 혹은 '좀비는 소리에 예민하다', '좀비는 밤에만 활동한다'라는 식의 키워드를 붙여서 그들을 생각한다.  


'Zoombie'는 '살아있는 시체'를 이야기하는 단어로서 그것에 대한 유래를 살펴보면, 서인도 제도 원주민의 미신과 부두교의 제사장들이 마약을 투여해 되살아낸 시체에서 유래되었다고 말한다. 마치 마약을 한 듯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 돌아다니는 모습 또한 이와 몹시 닮아있다. 좀비는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기이한 존재이다. 그들의 육체는 두발을 딛고 움직이지만, 그들의 정신은 하나의 자아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기에 인간과 유사하지만 인간이라고는 부를 수 없다. 짐 자무쉬가 그리는 좀비의 세계는 사실 그동안의 좀비영화에서 보이는 이미지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의 전작들 <커피와 담배>(2003), <천국보다 낯선>(1984), <미스테리 트레인>(1989) 등 인물의 고독한 내면 심리와 허무주의를 다루는만큼 <데드 돈 다이>에서도 그 모습이 드러난다. 그는 미국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서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보면, 할리우드식의 풍자와는 결을 달리 한다. 그의 작품들 속 인물들을 살펴보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그린다. 특히나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천국보다 낯선>(1984)의 경우에는 윌리, 에디, 에바 세 사람의 이방인이 마주하는 황량한 미국을 보여주며, 그들이 마주한 천국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객들로 하여금 의문점을 만들게 한다. 이러한 그의 세계는 <데드 돈 다이>에서도 반영되어 나타난다.                      


▲ 천국보다 낯선(!984) 스틸컷  © Grokenberger Film Produktion



죽었지만 죽지 않은 존재에 관하여  

영화는 차를 타고 가는 두명의 경찰을 조명한다. 나이가 든 경찰 클리프(빌 머레이)와 젊은 경찰 로니(아담 드라이버), 이 두 사람은 경찰차를 타고 순찰을 다닌다. 영화는 오프닝에서부터 '데드 돈 다이'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그들이 타고 가는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스터질 심슨의 노래 데드 돈 다이는 영화의 주제곡이면서 영화의 제목이 된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시에 영화는 같은 시간대 각각의 다른 장소를 교차편집해서 보여주면서 지구가 자전축을 벗어나는 이상기후에 대한 이야기가 라디오를 통해서 흘러나온다. 이상기후는 영화를 관통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상기후로 인해 무덤에 있던 좀비들이 깨어났기 때문이다.                      


▲ 데드 돈 다이(2019) 스틸컷  © kill the head


무덤 속에서 나와 깨어난 좀비들은 거리를 활보한다. 밤이 되어 황량하게 된 거리 속 걸어 다니는 좀비들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인다. 이들이 엄청난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소외된 인물들처럼 보인다. 자아를 가지고 있는 듯 말을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들은 어딘가 이상하다. “블루투스”, “와이파이”, “공구”, “패션” 좀비들은 각자 단어들을 되뇌인다. 문명사회의 것들과는 거리가 먼 좀비들이 말하는 단어들이 이런 것들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가 생긴다. 그들이 말하는 물질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판받는 물질만능주의를 이야기한다. 죽어서 좀비가 되었음에도 살아서의 기억들이 이러한 물질들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씁쓸한 요소임이 틀림없다. 


그러한 좀비들을 대하는 캐릭터들 또한 코미디적인 요소를 지닌다. 앞서 말한 경찰들은 사건을 해결하려 하는 의지를 지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모습을 지닌다. 이러한 태도는 관객들로 하여금 약간의 맥이 빠지는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일관된 캐릭터로 하여금 재미를 가져온다. 밤이 되고 좀비들을 피해 집안에 숨은 주민들과 경찰서 내에 있던 클리프, 로니, 민디 앞에 시체 검안사 젤다(틸타 스윈튼)이 등장한다. 그녀는 베일을 감추고 있는 인물들로 일본의 검술을 쓰면서 좀비들을 베어버린다. 갑자기 나타난 그녀는 경찰들에게 밖으로 나가서 순찰을 돌라고 말하며, 경찰서 내에서 해킹을 시도한다. 순찰을 돌면서 타이어 바퀴가 되고 좀비들이 몰려온 상황에서 그들은 초연한 자세를 보인다. 이미 시나리오의 결말을 감독이 알려줬다고 말하는 젊은 경찰 로니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클리프는 자동차 안에서 고민한다. 나갈 것인지 말 것인지.                     


 ▲  데드 돈 다이(2019) 스틸컷   ©kill the head



초기의 좀비 영화(feat. 조지 A 로메로) 속 좀비들은 

거리를 황량하게 떠도는 좀비들의 모습은 초기의 좀비물과 유사하게 닮아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좀비영화의 시초라고 불리는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에서 등장한다. 시골 마을에 아버지의 무덤을 방문한 조니와 바바라 자매, 그때 무덤에서 나타난 좀비들에게 습격을 당한다. 여기에서도 시체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원인이 인공위성에서 누출된 방사능 때문이라는 배경적인 요소가 등장한다. 이 부분은 <데드 돈 다이>에서 언급하는 이상기후로 인해서 시체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배경적인 요소와 유사하게 닮아있다. 아직 좀비 장르가 자리매김하기 전의 작품이기 때문에 좀비들은 엄청난 공격력을 지니기보다는 거리를 무의미하게 걸어 다니고, 불빛을 쫓고,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밤에 활동한다는 기본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시체들이 거리를 헤매는 모습은 마치 우리가 삶의 의미를 잃고 무의미하게 돌아다니는 것과 닮아있다. 좀비는 인간이 죽고 난 이후에 다시 살아난 존재이기 때문에 생과 사의 경계에 서있는 비존재이다. 즉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인간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인간의 모습을 띄고 있다.                      


▲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  © Image Ten, Laurel, Market Square


'감염', 전염성을 지니는 것은 좀비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다. 인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좀비 영화는 인간이 두려워하던 존재인 드라큘라나 뱀파이어에서 파생된 유형일지도 모른다. 19세기 말부터 유행하던 드라큘라 백작은 덴마크의 어떤 귀족백작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다양한 허구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비존재는 인간의 두려움에서 발현되었다. 우리가 그들을 무서워하는 것은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는 오빠인 조니가 좀비들에 의해서 공격을 당해서 사망하고 바바라 자매들이 어떤 집으로 피신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좀비의 존재에 대해서 잘 모르던 사람들은 좀비의 특징을 익혀가고 방어한다. 밤이 되면 좀비가 활동한다.라는 공식은 어떻게 보면 인간이 태초부터 두려움을 느끼는 어둠의 존재에 대한 이미지적인 표현이 아닐까 싶다. 역사를 보아도 19세기 산업혁명 이후에 전구가 발견되고 그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어둠을 밝힐 수 있는 요소가 되었다. 그렇게 전차가 들어오고 가로등이 들어오고 우리는 어둠을 밝힐 수 있는 것들을 찾아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무서움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좀비들은 왜 거리를 황량하게 걸을까? 

이러한 무서움의 존재로 표현되던 좀비 영화를 짐 자무쉬 감독은 코미디적인 요소를 끌고 들어와 변주시켰다. 좀비가 무섭지 않고 귀여운 존재로서 친근감이 느껴진다. 이상기후에 따라서 시체들이 깨어난다는 설정은 우리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환경의 파괴이다. 다시 말하자면 19세기 이후의 산업혁명은 인간에게 편리함을 가지고 옴과 동시에 환경오염을 만들어냈다. 밤이 되면 잠을 자던 인간들이 빛을 발견하고 밤에도 활동하게 되었고, 공장을 돌리고, 자동차를 타고 이러한 생활의 변화는 양면의 칼날을 지녔다.                     


▲ 모던타임즈(1939) 스틸컷   © Charles Chaplin, United Artists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1936)를 보면 인간은 기계처럼 공장에서 주어진 일을 반복적으로 일하고 무의미하게 살아간다. 생활의 편리는 있지만 그들의 눈에는 생기가 사라졌다. 마치 좀비와 같다. 이는 앞서 <데드 돈 다이>를 언급하면서 말한 좀비들이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물질주의적인 행동과 연관이 있다. 불빛이 켜져 있는 상가 주변에 모이고, 그들은 "블루투스" , " 와이파이" 등의 단어를 반복한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인간이 만들어낸 굴레이다. 생과 사의 경계에 놓여 있는 그들의 마지막 기억은 그런 것들이다. 감독은 좀비를 통해서 이런 사회 현상을 비판하고자 하였다. 영화 속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허무주의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이나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점은 마치 좀비와 같은 모습을 반영한다. 어쩌면 우리는 죽어있는 그들보다 더 좀비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 데드 돈 다이(2019) 스틸컷  © kill the head


<데드 돈 다이>는 두 명의 경찰 클리프와 로니가 자동차 밖으로 나와 좀비들과 싸우다가 잠식을 당하면서 끝이 난다. 그리고 이상한 존재인 젤다는 외계인의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사라진다. 이러한 결말은 약간의 충격을 준다. 하지만 잠식을 당한다는 것이 중요 포인트일 것이다. 우리는 이제 휴대폰이 없는 세상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량이 과다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있는지도 물어봐야 할 요소이다. 인간은 시속 30km로 걸어다닐 수 있지만 자동차나 비행기는 시속 100km를 넘는다. 하지만 그 속도로 인해서 인간이 사고를 당하기도 하며, 감당할 수 없기도 한다. 좀비들이 걸어 다니는 속도는 어쩌면 우리가 인위적으로 가공한 속도에 대한 아이러니가 아닐까? 우리는 어느 정도의 속도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너무 빠르게 보느라 그동안 지나치고 있었던 것이 존재하지는 않았는지 다시 한번 물어봐야 할 때이다.  



*씨네리와인드에서 작성된 기사입니다.



http://www.cine-rewind.com/sub_read.html?uid=5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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