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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늘 Jul 01. 2022

<파리의 피아니스트 : 후지코 헤밍의 시간들>/2022

피아노 선율을 갈망한 후지코의 파편들을 모아가는 여행 


87세의 일본인 피아니스트 후지코 헤밍, 이국적인 이름이다. 다큐멘터리는 2년간의 세월에 거쳐 후지코의 삶을 기록한다. 1년에 약 60회의 공연 및 콘서트를 할 정도로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녀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매번 새로운 피아노 앞에 앉는다. 카메라는 포커스가 맞지 않는 후지코 헤밍의 주름진 손에 주목한다. 점차 포커스가 맞아가며 희미하게 보이는 그녀의 손은 세월의 인장처럼 주름이 겹겹이 포개져 있다. 후지코의 삶은 테마를 통해 감싸고 있던 레이어를 한층 씩 벗겨내기 시작한다. 한 가지 알아야 할 진실은 후지코는 5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지만 본격적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것은 60대 무렵이었다는 것이다. 한 TV 매체를 통해서 자신의 이야기가 공개되면서부터 피아니스트로서 한걸음 내디뎠다. 후지코의 본명은 잉그리드 후지코 게오르기 헤밍. 독일 국적의 아버지와 일본 국적의 어머니의 결혼은 후지코의 정체성에 더욱 물음표를 생성했다. 전쟁의 혼란 탓에 국적을 잃은 채 살았던 시절, 후지코는 일본인이기도 했고, 독일인이기도 했다. 5살 무렵부터 엄하게 피아노를 가르친 피아니스트 어머니 탓에 어린 소녀는 무의식적으로 예술가의 삶을 언제나 동경하고 갈망했다. 그런 그녀의 삶은 어떤 식으로 변주하여 이내 자리를 잡았을까?


장황한 수식을 덧대지 않고 표면에 떠오른 사실만을 기재하는 자막과 내레이션은 영화의 주요한 관람 포인트 중 하나다. 내레이션은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연 미우라 토코가 맡아 파리를 동경하던 소녀의 어린 시절 시점으로 이야기를 더욱 섬세하게 전달한다. 미사키 역을 맡았을 때와는 색다른 매력이다. 대사가 적은 탓에 목소리를 많이 듣지 못했는데, <파리의 피아니스트 : 후지코 헤밍의 시간들>을 통해 마주하니 또 하나의 재미로도 다가온다. 담담하게 적혀있는 내용을 서술하는 음성은 경쾌한 음악에 맞춰 과거의 후지코를 상상케 한다. 1946년에 작성된 일기장은 삽화를 중심축으로 하여 풀어나가는데,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여행을 떠나는 느낌도 든다. 피아니스트로서 노래하듯이 연주해야 한다는 소신은 80대가 넘은 나이에도 삶의 활력소가 되어준다. 노래하듯이 연주하는 그녀의 건반은 기계적인 연습으로 터득한 것이 아니다. 공연이 없는 날도 하루에 4시간은 꼭 연습한다는 후지코의 경쟁상대는 본인 스스로다.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난 이후에 뜨는 블랙아웃은 마치 피아노 건반을 닮아있다. 피아노의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이 악보에 맞춰 움직이듯 그녀의 삶이 자유로이 연주를 하는 기분이 든다. 


전 세계를 무대 삼아 돌아다니는 후지코에게 연주회의 피아노는 매번 새로운 만남의 연속이다. 바이올린이나 첼로처럼 자신의 악기를 들고 다닐 수 없는 피아니스트에게 피아노는 늘 새롭다. 피아노의 녹이 슬고 낡은 형태는 후지코의 컨디션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중이염을 앓으며 오른쪽 귀의 청력을 잃고, 왼쪽 귀도 컨디션에 따라서 들리지 않을 때도 있다는 후지코. 고정성을 지닌 피아노는 여행 중 들르는 나라에 있는 후지코가 마련한 집과 닮아있다. 후지코에게 있어서 집은 흔적을 새기며,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이다. 파리에 주요하게 거주하지만 미국, 일본등 각지에 머무는 집은 다양한 색을 지닌 어린 시절처럼 경유하며 지나칠 수 있는 기차역의 플랫폼 같은 곳이다. 그곳에 머무르며, 변하지 않는 사진이나 일기 등의 기록을 발견한다. 아버지는 일본에 가족들을 두고 떠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사진을 통해서만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일본에서 눈이 파란 이방인으로 살던 자신의 모습을 두고 외국인의 피가 섞인 것도 애써 숨기려고 했다고 말한다. 그녀의 어머니가 피아노에 더 엄했던 이유를 짐작해보건대, 결혼 후 일본으로 돌아오면서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을 딸에게 투영했던 것이 아닐까. 나노 단위로 쪼개진 파편들은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후지코는 연주자로서 내면이 옹골지게 차 있는 사람이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방대한 스케줄을 소화함에 있어 매니저를 동행하지도 않고, 기차를 타고 이동한다. 피아노를 칠 때 자신의 모든 정신을 담아 임하는 모습에는 전율이 생긴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월광 소나타(클라우드 드뷔시), 피아노 협주곡 1번(프레데리그 쇼팽), 터키 행진곡(모차르트), 라 캄파엘라(리스트)등을 연주하는데, 카메라는 연주를 듣는 사람의 반응은 생략하고 연주를 하는 후지코를 조명한다. 생략된 반응들은 오히려 관객들에게 연주를 집중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한 “기나긴 인생 여정을 통해 나는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었다.”라는 말이 다시금 떠오르며, 관객들이 후지코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마주하며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 이 글은 아트나인 아트나이너로 작성된 글입니다. 글의 원문은 아래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iframe_url_utf8=%2FArticleRead.nhn%253Fclubid%3D25494727%2526articleid%3D9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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