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시골에서 3년
두 아이와 나는 늘 삼각관계였다. 18개월 터울의 남매 아이를 키우는 동안, 다른 도시에 사는 양가의 도움은 거의 받을 수가 없었고, 남편은 늘 회사일로 바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엄마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 다투곤 했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아이를 키우는 데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 혼자만으로는 역량 부족이고 또래와 상호작용을 하며 아이가 배운다는 것을 일치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별이와 친구들 사이에 트러블이 발생했다. 별이는 어리광이 심하고 아기같이 말을 했다. 그래서 상담도 받고, 놀이 치료 등도 시도했지만 아이는 거부감을 나타내며 오히려 틱이 심해졌다. 또래 치료를 시키며 사회성을 발전시키고 싶었는데, 또래 치료를 할 만큼 진전이 되지를 않았다. 어릴 때부터 놀이 품앗이 등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친구들이 집에 왔을 때는 또래의 언어와 행동을 배운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아이가 저학년일 때 나는 야간근무가 가능한 일을 구했다. 이틀에 한번 야간 근무를 하고 낮에는 반쯤 잠이 든 상태라도 집에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별이에게 언제든지 친구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친구들이 놀러 오면 떡볶이, 피자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만들어 먹이며 보드게임이나 카드놀이 등을 할 수 있게 했다. 마음이 편안한 집에서 놀이를 하면서 별이는 친구들과 신나는 시간을 보내며 또래 수준의 언어와 사회성을 발전시키는 소리를 잠결에 나는 들을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한 것은, 별이가 3학년 때쯤 사귄 친구 엄마들이 별이가 사회성이 좀 부족한 아이라는 것을 알고는 오히려 별이를 더 챙겨주셨다는 것이다. 1~2학년 때 오히려 드세고 말 많은 엄마들 때문에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모임에 참여하지 않고 아이에게 원하는 친구를 데려와도 좋다고 했던 것인데, 그렇게 아이가 데리고 온 아이들의 엄마들은 역시나 이해심이 많았고, 그게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 아는 나는 그 엄마들을 만난 것이 아직까지도 너무 감사하다. 그 후의 한국에서 학교 생활은 나름 수월했고, 아이는 약간의 틱 외에는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이렇게 하면 언젠가는 좋아지겠구나! 하던 중 갑작스럽게 호주로 오게 됬다.
캔버라 IEC에서는 모두 다른 문화권에서 온 영어를 못하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모두 다 약간은 혼돈의 카오스였던 상태로 아이는 두루두루 어울리며 지냈다. 한국 아이들도 여럿 있어서 공원에서 모여 자전거도 타고, 집에서 슬립오버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사회적인 면에서 트러블이 거의 없었지만, 사회, 영어면에서는 크게 발전도 없었던 시기라고 생각된다.
그러다 호주 시골 마을로 이사 오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아이는 적응하지 못했다. 캔버라의 학교 선생님이 말씀하신 자폐스펙트럼의 특징을 한국의 인터넷 등을 찾아서 별이에게 적용해 보았다. 별이는 눈 맞춤도 나와는 잘 되는 편이었고, 나에게는 애정을 표시하는데 주저가 없었다. 내가 달이를 출산해야 해서 친정에 별이를 잠시 보냈을 때, 18개월의 별이는 내 이름을 부르며 지나가는 기차에 손을 흔들었으며, 나와 영상 통화를 할 때는 눈물이 글썽거릴 정도로 나를 그리워했지만, 외할머니 할아버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만큼 애착관계도 잘 형성되어 있었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방식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긴 했지만, 이렇게 저렇게 정신없이 바꾸어 가며 다양한 방법으로 가지고 놀았을 뿐 특정 행동에 집착하는 모습은 없었다. 사회성 부분이 취약하긴 했지만, 자폐 스펙트럼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당장 한국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보고 싶었지만, 별이가 검사에 순순히 응할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은 멀쩡한 아이를 이상한 아이를 만든다며 펄펄 뛰었다. 아이는 학교에서 팔을 허공에 펼치고 빙빙 돌며 이상한 소리를 냈고, 틱은 점점 심해져서 아이를 보는 마음이 심란했다. 6학년짜리 아이가 수업시간에 교실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많이 혼란스러웠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이를 도와주지 못한다는 죄책감은 커져만 갔고, 차 한잔을 함께 하며 답답할 마음을 나눌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마을 도서관에서 Autism, ADHD 등에 관한 책을 빌려다 보기 시작했다. 다 영어로 써져 있어 이해하기 어려워도 별이를 위해서라니 정신없이 읽게 되었다. 신기한 것은 한국에서 읽었던 책들은 어떻게 고칠 것인지에 많이 초점이 맞춰 있었다면, 호주에서 읽는 책들은 부모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해 초점이 많이 맞춰 있었다.
‘If you want to label my child, super awesome will do just fine.’
(내 아이에게 병명을 붙이고 싶다면, 완전 멋짐이면 괜찮겠어요.)
‘Autism is not a tragedy ignorance is.’
(자폐는 비극이 아닙니다 무지가 비극이죠.)
등등 자폐스펙트럼을 받아들이고 그 특성을 키워주고, 취약한 점을 보완하라는 말이 많았다. 물론 어릴 때 빨리 발견하고 조기 개입을 한다면, 개선될 여지가 많기 때문에 그 부분은 강조를 하였지만, 별이는 그 시기는 한참이나 지났다. 언어지연이 없고 지능이 높은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되어야 발견이 가능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캔버라 학교에서 선생님은 자폐스펙트럼을 겁내지 말라고 했다.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아이들은 큰 어려움 없이 사회에서 자기 몫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나중에 만난 체카는 나에게 이런 생각을 더 확신시켜 주었다. 체카는 교육학/뇌과학 박사님인 동시에 시드니에서 오랫동안 일반학교와 특수학교의 교장선생님을 하다 퇴직하신 분이다. 운이 좋게도 시드니에서 6시간 떨어진, 한국의 내 고향에서는 꼬박 하루가 넘게 걸리는 이 작은 마을에서 우리는 이웃으로 만날 수 있었다. 체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아 다른 글에서 그녀와의 만남에 대해서 쓰고 싶다.
그러던 어느 날, 주 3일 도서관에 여는 도서관에 출근 도장을 찍으며 비슷한 책을 빌려 가던 나에게 사서인 줄리아는 아이들 심리에 관심이 많냐고 물었다. 아무렇지 않게 ‘응 나는 아들이 하나 있어, 한국에서는 ADHD라고 생각했고, 사회성이 좀 약하긴 했지. 그런데 호주에 온 지 일 년이 넘어도 학교에서 말을 한마디도 안 한데, 호주에 오니 자폐스펙트럼이 의심된다고 하는데, 나는 그게 뭔지도 잘 모르겠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뭔지도 모르겠어. 나는 그냥 세상에서 제일 엉망인 엄마가 된 기분이야.’라고 담담히 말을 했다. 그러자 줄리아는 본인도 자폐스펙트럼이 있는 아들이 있다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으니 연락처를 남겨 두고 가라고 했다. 이틀 후쯤인가? 또 마을의 한 아주머니께서 본인의 아들이 자폐스펙트럼이 있다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집에 초대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나를 집으로 초대해서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다. 그녀는 3남 1녀가 있는데, 그중 한 명이 자폐 스펙스럼이 있다고 했다. 고2 때 중퇴를 하고 지금은 컴퓨터 고치는 자신의 비즈니스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자폐 스펙트럼이 있어도, 독립적으로 잘 살아갈 수 있네요?’
‘그럼… 잘 살 거야. 걱정하지 마.’
‘네, 아이가 독립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게 제일 걱정이었어요.’
호주 사람들은 굉장히 개인적이라 사생활을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녀들은 안면도 없는 나에게 어쩌면 그녀들의 개인적인 어쩌면 아픔이라고 볼 수 있을 부분들을 이야기해주며 따듯하게 안아주었다.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시골 마을에 와서 얼마나 네가 고립됐다고 느끼고, 외로울지 알아. 그리고 별이 같은 아이가 있다면 더 힘들 거야. 혼자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언제라도 우리를 찾아와.’
그렇게 시작된 그녀들과는 아직도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나도 인식이 좀 바뀐 거 같다. 아, 생각만큼 큰 질병이 아니구나. 그냥 성향이고 부족한 부분은 발전시켜가면 되는구나. 발전이 되지 않는 부분이라면 어쩌겠어?? 속상해하며 나를 괴롭힌다고 나아질 것은 없잖아. 그저 있는 그대로 아이를 받아들이자. 우리 함께 하는 이 시간이라도 행복하도록.
그리고 나는 별이를 키우며 변화된 나를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꽤나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성격이다. 22살에 영국에 달랑 100만 원을 가지고 가 일 년 어학연수를 하고 삼백만 원이 넘는 돈을 다시 가져왔을 정도다. 웬만한 일은 스스로 할 수 있었고, 할 수 없어도 남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어서 포기가 오히려 쉬웠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것은 달랐다. 밥을 먹이고,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 주는 것 외에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엄마와만 의사소통이 된다고 해서 아이가 남들과 잘 어울려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타인들과 교류하며 교감하며 사회적인 소통도 배워야 했다. 별이는 그게 너무 어려웠다. 나는 도움을 청해야만 했다. 아이를 위해서 도움을 청하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특히 별이를 키우며 나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나도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고 싶었다. 자원봉사나, 내 시간과 능력이 필요한 곳이라면 먼저 손을 내밀 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사람들도 내가, 우리 아이들이 마을 커뮤니티의 일부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거 같다. 그리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아이들이 나를 보며 배울 거라는 생각에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또 별이는 영어가 싫어질수록 한국말이 좋아졌다. 집에만 오면 역사책을 읽어대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영어는 집어치우라고. 세종대왕님이 만든 세계 최고의 한글을 세계 공용어로 만들겠어!’
라며 큰 소리를 치는 아이를 보고 얼마나 웃었던지. 별이는 늘 그렇게 엉뚱한 생각으로 나를 웃게 만든다.
생각해 보면 이 아이가 가지고 있는 진단이나 상태가 무엇이든지, 나는 아이를 키우며 참 많이 배우고 변했다. 그리고 변한 내가 좋다.
‘별이야… 별이는 엄마 선생님이야. 별이는 엄마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생각하지? 덕분에 엄마 세상이 알록달록 무지개색이 된 것 같아’라고 고백을 하니 씩 웃는 얼굴이 너무 이뻐 크게 안아줘 본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한마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마을의 일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나도 많이 자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