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시골에서 3년
나는 야외 활동을 즐기지 않는다. 전생에 뱀파이어였는지, 햇볕만 쬐면 머리가 아프고 기운이 없다. 중고등학교 내내 체력장에서 한 반에서 한 손에 꼽을만한 5급의 영예를 쭈욱 독차지할 정도로 저질 체력을 타고났다. 학교를 졸업해서 정말 좋았던 건 콕콕 쑤시는 배를 움켜쥐고 운동장을 더 이상 억지로 달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 두 아이들은 나의 보잘것없는 운동능력을 닮고 태어났다. 아이를 키우며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 운동이 뇌 발달에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골마을에 오자 마자 달이는 넷볼과 댄스를, 별이는 농구와 테니스에 등록을 했다. 한국이나 캔버라에서는 학원에 돈을 주고 보내면 나는 데려가고 오기만 하면 됐다. 이 시골 마을에는 학원이 없었다. 이익이 날 만한 충분한 수요가 없기 때문이다. 헬스장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만 14세가 넘어서야 등록할 수 있어서 우리 아이들은 해당사항이 없었다. 댄스와 테니스는 한 시간 거리의 조금 더 큰 도시에서 선생님이 일주일에 한 번 와서 수업을 했다. 그리고 넷볼과 테니스는 마을 사람들이 운영회를 만들어 진행하고 있었다. 엄마 아빠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회를 만든다. 운영만 하는 게 아니다, 코치, 감독, 심판 모두 마을 사람들이다.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를 따라다니며 스포츠 클럽을 운영하는 것을 지켜본다. 학교도 안 간 아이가 농구 네트볼 게임을 하고, 호루라기를 손에 들고 심판을 본다. 부모는 옆에서 지켜보다 아이가 물어보면 룰을 알려 준다. 부모들은 지켜만 보고 있지 않다. 그들이 바로 선수다… 제일 놀랐던 게 내 또래의 아줌마들이 아저씨, 하이스쿨 아이들과 함께 농구, 배구, 넷볼 게임을 함께 하는 거였다. 내가 워낙 몸을 쓰는 것에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아줌마가 농구하고 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하는 편견이 내게도 있었다.
첫날부터, 유난히 몸치인 우리 아이들을 경기 룰도 가르쳐 주지 않고 그저 경기에 넣어 버렸다.
‘Go on! Have a shot’ (해봐, 슛 해봐)
우리 아이들은 농구공, 넷볼공도 오늘 처음 만져 보는 거라며 걱정스러워하는 내게 괜찮다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슛을 해봐, 패스해봐 하며 몇 달은 해온 아이들인 양 경기에 자연스럽게 넣어버렸다. 아이들은 뻣뻣한 모습으로 긴가민가 하며 패스도 하고 슛도 해보며 경기를 한 회 한 회 치러 갔다. 실수해도 너그러운 눈빛으로 바라봐 줬기에 꾸준히 해 올 수 있었다.
‘Bad luck!’ 골대에 가까이도 못 간 어이없는 실수에도 운이 안 좋았다며 아이들을 달래 주었고,
‘Nearly!’ 그보다 조금 더 골대 가까이 갔다면 거의 될 뻔했다며 격려해 주었다.
처음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코트 한구석에 뻣뻣하게 서 있을 더니 어느새 블로킹도 하고, 패스도 곧 잘하고 움직임에서 자신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경기를 해온 다른 아이들은 다 잘하는데 자기들은 너무 못한다며 속상해하고 부끄러워하던, 하지만 매주 경기장에 나타나던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 코치들은 Encouragmnet award (격려상)를 주며, 누구보다 많은 발전을 보여줬기에 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며 크게 칭찬한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상식에 앞서 교장 선생님은 늘 강조한다. 최고로 잘하는 아이보다 가장 많은 발전을 보인 아이에게 상을 줬다고. 그러니 PB( personal best)에 집중해서 아이의 성취를 축하해 달라고.
호주가 2019년 학력평가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받았다. 한국은 상위권을 차지한 것 같다. 하지만 학교에서 행복도나 만족도 확실히 호주가 더 높은 것 같다. 이곳이 작은 시골 학교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아이들은 학교 체육 시간을 이용해 동네 강가에 물고기를 낚시해 와 학교 식당에서 튀겨 먹기도 하고, 농업이라는 과목이 있어 닭도 키워 알도 낳아 보고, 양도 키우고 텃밭도 가꾼다. 위험해 보이는 공구를 이용해 나무를 조각하고, 금속 용접도 해본다. 중3 아이들은 마을의 소방 방위대 활동에 참가해서 소방 호수를 다루는 법을 배운다. 고등학생 아이들은 초등학교 아이들의 수영 레슨을 도와준다. 농구 클럽, 네트볼 클럽 등에서 코치를 하고 심판을 보는 것도 대부분 하이 스쿨 아이들 담당이다. 부모나 동네 사람들이 하는 것을 아주 어릴 때부터 보고 컸기 때문에 행사를 주최하고 진행하는 것에도, 성인인 데다 사회생활을 좀 해 본 나보다 훨씬 익숙하다. 하이스쿨을 입학하면서부터 동네 슈퍼, 자동차 수리 등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이들도 많다. 물어보니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지 않고, 자기가 일을 해서 돈을 모아 가지고 싶었던 악기나, 생애 첫차를 구입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확실히 학력적으로는 떨어지는 부분이 많지만, 생활 속에서 보고 배워 놀랍도록 독립적인 생활이 일찍부터 가능하다. 이 곳에 있다 보면 저 아이가 한국의 공부방이나 학원의 도움을 조금만 받았다면 정말 공부를 잘했을 텐데, 너무 영리해 공부로 한 자리할 것 같은 아이도 자동차 수리를 하고 있어, 역설적으로 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느껴지기 한다. 하지만 공부에만 올인하는 게 아니라 전인 교육을 하는 것,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은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3년간 이 마을에서 지내며 기쁜 일과 즐거운 일도 많았던 만큼 슬픈 일과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삼십 대 중반의 젊디 젊은 아빠가 하루아침에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어린 세 아이와 남겨진 엄마를 위해, 엄마가 마음을 추스를 수 있을 때까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로스터를 짜서 식사를 준비했다. 얼마 전 크리스마스마스 때, 사십 대의 젊은 아빠가 바닷가에서 낚시를 하다 실종이 됐다. 아이 아빠의 흔적이라도 찾으려 헬기와 비행기를 빌려 수색을 하는 것은 큰돈이 든다. 마을 사람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았다. 그 와중에 이번에 중학교에 들어가는 그의 아이는 생일을 맞았다. 아빠를 잃은 아이의 13번째 생일날이 슬픈 기억으로 남지 않게, 같은 반 학부모들은 돈을 모아 아이의 생일선물을 준비해 작은 파티를 열어 주었다. 얼마 전 호주 산불에 내가 일하던 가게의 주인 바네사와 피터는 집을 잃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이 이어졌다. 다음날 아침부터 가게에 찾아와 안아주며 위로했다. 그들을 위로하려 여러 명이 줄을 서 있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들의 보험이 해결되어 집을 다시 지을 수 있을 때까지 무료로 머물 수 있는 집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었고, 곧 신학기가 되어 학교로 돌아갈 아이들의 교복과 학용품을 준비해 줬다. 멜버른에서 태어나 시드니에서 살다 이 마을에 정착한 바네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며, 그들이 도시에서 살았다면 지금 아주 절망했을 거라며. 하지만 이 작은 커뮤니티 안에서 우리는 괜찮을 것을 안다며 감사를 전했다.
‘We know we will be okay in this lovely, supportive community.'
작년 갑작스럽게 젊은 남편을 사별하고 세 아이를 혼자 키워야 하는 칼리는 언제나 미소 지으며 남편이 있을 때와 똑같이 아니 더 열정적으로 아이들을 뒷바라지하고 있다.
‘남편이 죽은 건 정말 슬프지만, 마을 사람들의 엄청난 도움은 날 빨리 일어날 수 있게 했어. 가끔은 나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이 마을이 저주 같이 느껴질 때도 있어. 하지만, 최소한 우리 아이들이 여기서 괜찮을 거라는 걸 알아. 그거면 나는 됐어.’
작은 마을은 오랫동안 혈연과 지연으로 아주 촘촘히 그물처럼 관계가 짜여있다. 그래서 낯선 이는 스며들어가기 쉽지 않은 경우가 많고 상처를 받아 떠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적당한 검증 기간(?)을 거쳐 믿을만한 사람으로서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면, 가족 같이 친구같이 대해 주는 시골인심이다. 가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해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한가하고 평온한 마을이라 가십은 사람들의 즐거운 유흥거리고 소문은 늘 그렇듯 부풀어 퍼져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어려움에 처하면 사람들은 서로를 돌봐준다. 아이가 자라는 데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 호주에서 나는 하나의 마을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