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학교에서 4년
‘아이들은 학교에 가면 영어 다 배워… 엄마만 잘하면 돼’
갑작스러운 남편의 호주 발령으로 당장 3개월 후에 아이들을 데리고 호주로 나가야 한다. 회사도 그만둬야 하고, 집도 정리해서 이삿짐을 보내야 한다. 가장 큰 걱정은 영어 학원 한번 다녀 보지 않은 2학년 4학년 두 아이의 현지 적응이다. 사람들은 아이들은 호주에 떨어지자마자 당장 적응할 것처럼 얘기했다. 그래... 그럼 될 대로 되지 않겠어? 그렇게 안일한 생각을 하고 호주에 왔다.
캔버라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 캔버라에는 총 4 군데의 IEC (Introductory English Centre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아이들이 일반 학교에 다니기 전 과정으로 보통 6개월, 2 텀 다닌다.)가 운영되고 있어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가게 되었다. 마침 캔버라 대사관이 밀집해 있던 곳 근처에 있던 학교는 프랑스, 스위스, 부탄, 이라크, 중국,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온 아이들로 국제학교 같은 느낌이었다. 성공적으로 반년만에 영어를 습득해서, 메인스트림 (IEC-> 일반 학교로 옮길 때, 일반학교를 mainstream이라고 한다.) 2 텀(호주의 학제는 2 학기, 4 텀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에 충분히 영어를 익혀, 학교로 옮겨 즐겁게 생활하는 아이들도 있고 3 텀, 4 텀을 다녀도 통 익숙해지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은 모두 다른 방법으로 각자의 속도에 맞추어 배운다.
별이와 달이는 빨리 익숙해지지 않는 편이었다. 별이는 시간이 많이 필요할 거라 예상을 했지만, 늘 수업 시 집중을 잘하고 언어 능력이 좋다는 평을 듣던 달이 까지 빠른 발전을 보여주지 못하자 마음이 많이 다급했다. 두텀쯤 지나도 달이의 크게 실력이 늘지 않는 원인을 생각해 보니, 두 아이가 같은 반에 있는 것이 문제였다. 낯선 환경에 돌발 행동을 하고, 집중을 보이지 못하던 별이와 한 반에 있던 달이는 별이를 끌어당겨 제 자리에 앉히고, 돌발행동을 하지는 않는지 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쓰느라 정작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이다. 또 학교에서,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오빠의 저런 모습을 보고 달이는 별이가 밉고 부끄럽다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집에서는 별이랑 예전처럼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하며 잘 놀다가도, 학교에 가서는 아예 모른 척을 하는 것이다. 또 한 번은 담당 선생님께서, 별이가 좀처럼 수업에 집중을 못한다고 말씀하시며, 달이도 비슷한 성향이라고 말씀을 하시자 큰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내가 멀쩡한 아이를 아무 준비 없이 외국에 데려와 엉망을 만드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처음에는 별이를 잘 도와줘야지 라고 타이르던 나도, 결국에는 ‘학교에서는 오빠 신경 쓰지 말고, 너 할 일만 하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영어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든 두 아이는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더 차지하길 원했다. 또한 학원, 방과 후 활동, 놀이터 등 아이들이 따로 갈 곳이 많던 한국과 달리 호주에서는 등하교부터 시작해서 수영, 슈퍼 어디에 가든, 늘 세 명이 한 몸처럼 붙어 다녀야 했다. 성향이 다른 두 아이 사이에서 중심을 잃지 않게 외 줄 타기를 하는 듯 늘 아슬아슬했다. 그렇게 3 텀의 IEC를 마치고 메인스트림으로 각 다른 학년으로 아이들이 배정되자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달이는 아직 꽤나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수업에 잘 집중하고 영어도 많이 늘어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별이는 오히려 문제가 더 부각되었다. IEC에서는 모든 아이들이 언어와 문화에 낯설어 많은 부분 용납이 되었던 것들이, 일반 교실에서는 두드러지게 눈에 뜨인 것이다. 호주에서 생활한 지 1년이 되어 가지만, 영어를 거의 알아듣지도 못하고, 학교에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던 별이의 담임선생님은 조심스럽게 혹시 자폐스펙트럼이 아닐까 말씀을 하셨다. 그때까지 나는 자폐 스펙트럼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자폐는 말을 전혀 못 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거나, 레인맨의 더스틴 호프만 같은 심각한 자폐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선생님 앞에서 눈물이 쏟아지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선생님은 본인은 의사가 아니라 정확한 진단을 할 수도 없고, 선생님으로 이런 말을 할 수도 없지만, 별이가 그냥 둔다고 좋아질 부분은 아닌 거 같아 귀띔해 주는 거라 하셨다. 그리고 미소를 띠며 따뜻하게 나를 안아 주셨다.
'자폐 스펙트럼에 대해 너무 겁내지 마, 별이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다만 다른 아이들보다 많은 전략(strategy) 이 필요할 뿐이야.'
사실 한국에서도 별이는 ADHD가 아닐까 생각을 하기도 할 정도로 주의가 산만할 때가 있었고, 사회성이 유독 취약해서 친구들과 관계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또 워낙 순수하고 거짓이 없는 아이라 선생님들이 많이 이해해 주시고 이뻐해 주셔서 늘 감사했다. 또 이해력이 좋고 창의력이 좋다는 말을 많이 하시며 오히려 걱정을 하는 내게 초등학교 3, 4학년쯤 되면 좋아질 거라며 많이 격려를 해 주셨다. 병원에서 검사나 놀이 치료 등을 받아 보기도 했지만, 아이가 참여하려는 의지가 낮고 너무 싫어해서 오래 하지는 못했다. 그런 아이를 데리고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낯선 호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러다 캔버라 집 계약이 만료가 될 즈음, 나는 두 아이 사이에서 외줄 타기가 많이 힘들어졌다. 셋을 잇는 줄이 너무 팽팽해서 어느 순간 툭 끊어지고 말 것 같은 기분이 종종 들었다. 그래서 아이 아빠가 일하던 호주 시골로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인구 1500명의 작은 시골 마을. 영화관, 맥도널드 KFC 도 없고, 작은 슈퍼 하나와 열개가 채 안 되는 상점이 마을 센터의 전부 인 곳. 큰 슈퍼마켓을 가려고 하면 한 시간을 100km로 달려가야 하는 곳. 이 곳에서 우리는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그래도 이 팽팽한 삼각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좋은 공기를 마시며 넓은 들판에서 실컷 뛰어놀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한국으로 돌아가면 서로 일에 학업에 바빠, 잘 보지 못할 아빠와의 시간을 아이들이 최대한 누릴 수 있었으면 했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호주에 와서 많이 혼란스럽고, 어쩌면 많은 부분을 놓친 아이들이 호주에서 얻어 갈 수 있는 건 그 두 개가 아닐까 싶은 마음에서 이사를 결정했다. 그리고 3년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