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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Writes Feb 12. 2020

미안하다고 하지 마! 자존감 키우기

호주 학교에서 4년 

 별이가 졸업한 초등학교에서는 졸업식날 전통적으로 학부모 대 학생 간 소프트볼 경기를 한다. 아침 9시, 부모팀은 회사에 휴가도 내고, 가게문도 닫고 한 명도 빠짐없이 학교 잔디밭에 모였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인정 사정없다. 결과는 부모팀의 승리! 그 후에 교실에서 케이크를 자르고 짧은 행사로 졸업식이 마무리된다. 그리고 졸업생 아이들은 선생님과 함께 마을 카페에서 식사를 하는 것으로 하루는 마무리된다. 두 아이는 각각 한 학년에 한 명 주는 수학상을 받았다. 솔직히 한국에서라면 얼마나 형편없는 수학 실력인 걸 아는 나는 별로 기쁘지 않았다.

‘영어나 빨리 늘어서 영어 상을 받았으면  좀 좋았으련만…’ 하는 욕심이 더 컸다. 

하루 종일 사람들은 나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너희 아이들은 정말 똑똑하구나’

나는 한국에서처럼 손사래를 치며

‘아니야, 운이 좋았어. 실제로는 그렇게 잘하는 것도 아닌걸’ 이라며 나름 겸손을 보였다.

일 년의 시간 동안 나랑 꽤 친해진, 다정하고 현명하지만 할 말은 꼭 해야 하는 칼리는 내 말을 이해 못하겠다는 듯, 눈을 똥그랗게 뜨고 옅은 미소를 유지한 채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왜 한국에서 보다 못하면 축하하면 안 되는 거야? 너희 아이들은 이렇게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곳에 와서 이렇게나 잘 어울려 지내는 걸. 난 니 아이들이 정말 자랑스럽고 대단한 걸. 너도 아이들을 좀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그녀의 너무나 진지한 충고에 갑자기 변명이랍시고,

‘글쎄, 난 한국 엄마고 우리는 이런 대단치 않은 성취는 별로 축하하지 않아.’ 

‘We don’t celebrate mediocre success that much.’라고 내뱉고는 집에 와서 한참이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왜 우리는 보통의 성공을 축하하지 않을까? 그 생각은 한동안이나 나를 사로잡았다. 


 실은 별이는 때에 맞추어 졸업을 못할 뻔했다. 다행히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사귀어 서로의 집을 오가며 우정을 쌓았고, 선생님들의 배려와 이해로 즐겁게 지냈다. 하지만 여전히 별이는 학교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커뮤니티 서비스의 리퍼럴을 받아 검사도 받아보았지만, 이렇다 할 문제나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는 역부족이었다. 아이가 한국에서 학교 생활에 문제가 없었다면, 호주에 온 지 3년이 넘지 않은 아이에 대해서는 새로운 문화와 언어에 적응하는 중으로 보고 판단을 유보하는 게 좋다고 했다.  

이제 새로 전학한 학교에 적응해서 다닐 만해지자, 다시 하이스쿨로 옮겨 가야 할 때가 닥쳤다.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께서는 하이스쿨에 가면 공부량도 많아질 것이고, 수업시간마다 교실을 옮겨 다녀야 하며 선생님들도 과목마다 달라져 별이가 적응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며 말문을 여셨다. 게다가 인원이 적은 학교라 5/6학년 합반이었는데, 별이가 친하게 지낸 친구들은 5학년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별이는 1년 동안 정이 든 학교와 친구들과는 헤어지고, 늘 짓궂은 쌍둥이 형제와 함께 하이스쿨로 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6학년을 한번 더 반복하면 어떠냐고 말씀하셨다.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를 꿇다니!!’ 

남편과 나는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또다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고 고생할 별이를 생각하니 그냥 편한 환경에서 일 년 더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기 전에 별이의 의견을 물었다. 별이를 괴롭히던 남자아이들은 모두 중학교로 가고, 친한 아이들만 남아 일 년 더 그 아이들과 즐거운 일 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별이는 중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다. 

‘중학교에 가면 너 스스로 교실을 찾아가고 공부를 하는 것을 배워야 해, 엄마가 도와줄 수 없어. 괜찮겠어?’

‘응 해볼래.’

그래... 적응 못하면 내가 집에서 홈스쿨링 시키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별이를 중학교로 진급시키겠다고 우리의 결정을 전하자 교장선생님은 적극적으로 변해 나를 설득했다.

‘He will struggle, deeply.’ 아주 많이 고생할 거야. 

하지만 조의 눈을 보면서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이의 선택이에요. 별이가 원하지 않는다면 편한 환경, 좋은 친구가 무슨 소용이 있나요? 나는 최선을 다해 아이의 선택이 잘 된 선택이 되기만을 도와줄 거예요.”


  그렇게 미심쩍은 눈빛을 뒤로하고 별이는 졸업을 했다. 중학교 진급 전에 딱 한번 교장선생님과 7학년 담당 선생님을 만났다. 이때까지 호주에서 아이가 지난 시간을 설명해 주었고, 초등학교에서는 아이가 중학교에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중학교에 오는 것을 아이의 선택했고 나는 아이를 지지하겠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는 낯선 마을에 이사 와서 적응하는 기간이라 내가 자주 학교에 찾아가 도와줬지만, 지금부터는 아이의 독립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학교에 찾아오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혹시 무슨 일이나 내가 도와줄 게 있으면 연락을 먼저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한 번의 연락이나 방문도 없이 6개월이 지나 첫 학기가 끝나고 학부모와 선생님의 공식 면담이 있었다. 과목 선생님들도 처음 만나는 긴장되는 자리였다. 과목수에 맞춰 열명쯤 되는 선생님을 약 10분 동안 1시간 30분에 거쳐 만나는 마라톤 상담이었다. 아직도 아이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선생님들은 별이가 얼마나 착하고 밝은지, 얼마나 지식과 호기심이 많은지, 얼마나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지 … 칭찬만 듣고 와 얼떨떨했다. 물론 아직 영어에서 자유롭지 않아 성적이 좋았다는 건 아니지만, 호주에서는 성적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별이가 우리 학교에 있다는 게 좋아요.'라고 말해주는 선생님들 덕분에 구름을 걷는 듯 행복했다. 선생님들은 유쾌했고, 스스럼이 없었다. 아이가 학교를 가기 싫다고 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렇게 2년의 하이스쿨 생활 후, 아이는 드디어 영어에서 C를 받게 되었다. C가 무엇이 호들갑일까 싶겠지만, 나는 올 A를 받은 것보다 더 기뻤다. 그걸 지켜보던 달이는 

‘엄마는 겨우 C를 받은 게 뭐가 좋아? 호주 친구들은 다 C 이상은 받는다고! 나는 A를 받았는데, 내가 더 기특하지 않아?’라고 물었다.

‘별이는 그동안 영어에서 E와 D를 받았는데 이번에 C를 받은 게 얼마나 기특하니? 엄마는 네가 A를 받은 거나 별이가 C를 받은 거나 다 너무 기특하고 기뻐.’

나는 본래 성적에 연연하지는 않는 편이었고, 이제 조금은 아이의 개인적 성취에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쯤, ‘정말, 그럴까?’ 하며 의심쩍은 미소를 띠는 시험은 찾아왔다. 


  호주를 떠나 베트남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할 일이 또 역시나 계획도 없이 닥쳤다.  그러다 보니 4년간의 호주 생활 내내 생각지도 않던 나중에 대입 특례 입학이라는 선택지가 생각지도 않게 추가되었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아이의 호주에서 전기 간 성적표를 대사관에서 공증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찾아보니 아이의 캔버라 학교 성적표가 없었다. 상상도 해본 적 없는 형평 없는 성적에 충격을 받은 것과 동시에 그 성적표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없애 버린 것이다. 하지만 혹시 모를 아이의 경우의 수를 날려 버리지 않기 위해서 성적표를 다시 발급받아야 했다. 캔버라에서 다니던 학교에 성적표 재발급과 재학 확인서를 발급해 달라고 하자 이메일로 파일이 날아왔다. 재학 확인서에 학교 사인이 필요했다. 캔버라 대사관을 방문하기 전에 학교에 연락해서 사인과 도장을 찍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사인을 받고 캔버라 대사관에 도착해서 보니 성적표에도 선생님들의 사인이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설마 사인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못하고 확인하지 못한 내 불찰이었다. 사인이 없는 서류는 휴지 조각보다 나을 것이 없다. 그래서 다시 학교로 가서 혹시나 교장 선생님이 계시면 사인을 받을 수 있겠는지 물어보았다, 이미 아이들을 맡았던 선생님은 다른 학교로 옮기고 없었다. 학교 리셉션에는 그날따라 아픈 아이들이 많았다. 머리가 아프다 배가 아프다 호소하는 아이들 옆에서 직원은 괜히 늘어난 일거리에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게 눈치를 받고서야 교장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학교는 성적표를 한번 나누어 주고 그것으로 끝이에요, 그 후에는 다시 발급해야 할 의무가 없어요. 그리고, 초등학교 성적표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아이들은 하이스쿨이나 가서 제대로 학습을 시작한다고요. 우리 학교에는 전 세계 많은 나라 아이들이 왔다 자기 나라로 돌아 가지만, 이렇게 성적표 재발급이나, 재학 증명서를 요구하는 건 한국 아이들밖에 없어요. 그리고 리셉션 직원의 업무는 재학 중인 아이들을 돌보는 거지 이미 떠난 아이들의 서류 업무는 그 직원의 일이 아니라고요!’

변명할 여지도 주지 않고 쏟아 내는 그녀의 훈계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성적표의 점수대로 라면

‘당신의 아이는 대학 가까이에 가기도 어렵습니다.’라는 성적표를 들고서는, 몇 년 후에 대학에 갈 서류로 쓰겠다고 다시 사인을 해달라고 와서는 이런 호통을 듣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고 부끄러워 자리를 뜨고 싶었다. 

'당신의 아이는 대학 가까이도 가기 어렵습니다.'

' 아이는 말도 못 하는데요.'

' 아이는 학교에 적응을 못하는데요.'

아무도 지금  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는데머릿속에서 옛날의 기억들이 순식간에 떠올라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그리고는 곧 아이의 성적표와 아이를 잠시나마 부끄러워한 내가 더 부끄러워졌다. 한국에 있을 때는 사과를 한 적이 많았다. 아이가 잘 못한 게 아닌 데도 그냥 나는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에 움츠려졌다. 아이를 위해 당당히 변호해 주지 못하고 사과만 했던 내가 무능력하게 느껴지던 때가 많았다. 


‘바쁘신데 찾아와서 이런 요구한 것은 죄송합니다. 서류를 챙기지 않은 건 제 불찰이었어요. 그리고 그 직원의 업무 리스트에 이미 학교를 떠난 아이들 서류 챙기기가 없다는 걸 잘 이해해요. 그 직원의 일이 아닌데, 그 직원의 업무량이 늘어나게 된 것 정말 미안하고 고맙게 생각해요. 저도 회사에서 일을 할 때 나랑 상관없는 업무를 맡았을 때 정말 짜증이 나거든요. 그 서류가 필요한 순간이 있을 거라는 걸 생각하지 못했어요. 이 성적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 아이는 준비 없이 호주로 와서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하지만, 이 아이는 포기하지 않았고 노력해서 지금은 즐겁게 생활하고 있어요. 난 우리 아이가 정말 자랑스러워요. 우리 아이가 대학을 갈 수 있을지 없을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한국 대학을 가고 싶을지도 모르겠고요. 또 이 서류가 얼마나 도움이 될 지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혹시 모든 준비가 되었을 때 이 서류가 없어서 아이가 아까운 기회를 날리는 것만은 피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좀 도와주시겠어요?’라고 밝게 웃으며 언짢으신 선생님에게 부탁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선생님은 갑자기 화가 난 얼굴에서 의아한 표정으로 그리고 다시 웃는 얼굴로 표정이 바뀌시며 내 손을 잡아 주셨다. 

‘당신을 엄마로 둬서, 당신 아이들은 참 운이 좋아요.’라고 말씀하셨다. 나를 처음 보는 선생님이 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실까 의아했다, 호주 사람들은 역시 칭찬에 후하다고 생각하며

'아이들 성적표도 다 버려 버리는 형편없는 엄마인데요?’라고 농담을 건너자 선생님과 나는 한바탕 웃었다. 

‘혹시나 별이가 호주도 맘에 들어한다면 호주 대학으로 보내세요. 호주 대학은 아주 열려 있답니다. 별이가 좋아할 거예요’ 생각지도 않은 제안을 받고 하루 종일 움츠려 들고 우울하고, 부끄러워 도망가고 싶은 마음은 모두 날아가 버렸다. 


 나는 사과하는 게 늘 익숙했다. 목소리 크게 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좋은 말로 하면 예의 바른 착한 사람이었고, 실제로는 겁쟁이 바보였다. 그러고는 집에 오면 억울해서 밤에 애꿎은 이불만 걷어차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이 시골마을에서 나는 사과한 것을 사과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테니스를 치면서 너무 못해서 하루 종일 미안, 미안이라는 소리를 해야만 했을 때,

제인은 내 눈을 똑똑히 보며 

‘Never ever apologize for that. You are trying.’ (사과하지 마, 너는 노력하고 있잖아.)라고 했다. 

평소 깐깐한 그녀가 어찌나 진지한 얼굴로 그 말을 하는지, 나는 또 그녀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까 무서워 ‘Sorry’ 소리가 목구멍을 올라올 때마다 입술을 꼭 깨물었다. 

가게에서 일을 할 때도, 99.9%는 좋은 손님들이지만, 정말 가끔 무례한 손님들이 있다. 나를 어린 동양 여자로 보고 짓궂은 농담을 던지거나,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으며 괴롭히는 사람이 가끔 있었다.

그러면 피터나 바네사는, 원래 둘 다 다혈질 이긴 하지만, 당장 이 가게를 나가라며 너희 같은 사람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는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곤 했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도 않고 그저 그 순간을 모면하려던 내게, 

‘You can’t just let them treat you like that.’ (저 사람들이 너를 그렇게 대하게 놔두면 안 돼.) 

라며 아무 말 못 하던 나를 들들 볶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런 일이 생기면 내가 먼저 그런 손님이 오면

‘Well, you can’t just talk to me like that.’ (나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라며 정색하며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호주 사람들은 내 눈에는 염치없는 요구도 서슴지 않았다. 당당한 표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학교니, 마을 위원회에 쏟아 냈다. 

 ‘내가 요구하지 않으면, 내가 필요한지 않은지 학교가 어떻게 알아?’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어깨를 으쓱 해 버릴 뿐이었다. 

미안하지 않은데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거의 멈출 수 있게 되고, 내가 원하는 걸 말하는 게 부끄럽지 않게 되자 나는 내가 좀 좋아지기 시작했다.  


별이의 졸업식. 학부모 VS 학생들간이 소프트볼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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