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reenWrites Feb 13. 2020

나의 롤모델, 그녀 같은 열정으로 인생을 살 수 있다면

호주 시골에서 3년 

  세 달쯤 되었을까? 매주 화요일 학교가 마치면 별이는 체카네 집으로 간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열쇠가 꽂아진 현관문을 스스로 열고 들어가 ‘체카, 나 왔어요.’라고 크게 소리쳐야 한다. 한 시간 남짓 체카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도 하고 요리도 하고 그림도 그리다가 브라우니, 커스터드 슬라이스 같은 디저트를 잔뜩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럼 나는 전기 주전자 스위치를 켠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2년 전쯤 가게에서였다. 자그마한 체구에 고운 은발 단발머리, 항상 머금은 미소가 사랑스러운 그녀는 꽃모종과 비료를 사러 가게에 오곤 했다. 이름을 교환하고, 그녀는 시드니에서 나는 한국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서로의 손주와 아이들 사진을 보여주며 일상을 나누며 그렇게 조금씩 알아 갔다. 어느 날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걸어가던 출근길에 곱게 화장을 하고 담배를 피우며 정원에 물을 주고 있던 그녀를 마주쳤다. 그녀는 우리 집에서 한 블록쯤 떨어진 곳에 힘껏 내달리면 1분 안에 닿을 곳에 살고 있었다.

그녀의 집은 그 길을 오가던 내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던 독특한 구조의 집이었다. 포카리스웨트 광고에 나오는 산토리니 섬에 있는 듯한 둥글고 하얀 느낌의 집이, 호주 시골 마을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레모네이드를 한 잔 하고 가라며 나를 초대했다. 들어가 보니 둥근 구조물은 실내 정원이었다. 이 산골 마을의 차고 매서운 바람은 막고 따스한 햇살 속에서 식물과 그녀가 좋아하는 향초와 꽃향기가 넘실 거리는 곳. 나는 그곳에서 그녀와 차를 마시는 게 좋았다. 그녀는 필요한 게 있으며 언제나 연락하라며 옅은 분홍빛 명함을 주었다. 깔끔한 명함에는 Dr. 프란체스카라고 쓰여있었다. 

  

   그녀는 시드니에서 교장선생님을 오래 하다가 은퇴하고 아픈 동생을 돌보기 위해 이 마을로 이사 왔다. 경험이 풍부하고, 아는 것이 많고, 에너지도 넘쳐 말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조금도 지겹거나 지치지 않았다. 얼굴의 반과 뇌의 절반을 반점이 덮고 태어나, 아기 때 뇌 반쪽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던 큰아들 로비. 그리고 그 아래로 세 명의 자녀를 더 낳고 이혼 후 싱글맘으로 살아가던 이야기. 학교에서 교사로, 교장선생님으로 풀타임으로 근무하며, 혼자 네 아이를 키우며 16년에 걸쳐 두 개의 석사 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던 이야기. '남자' 수녀가 된 게이 남동생 이야기. 동성 결혼을 한 레즈비언 딸 이야기. 고향인 이탈리아의 작은 섬에서 유일한 교사였던 할머니가 글자도 모르던 양치기 할아버지와 정략결혼을 한 이야기. 어린 시절 치과 의사이던 아버지를 따라 유럽, 인도 등을 여행하던 이야기. 낯선 내게, 또는 궁금해하는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펼쳐 놓는 그녀의 이야기는 흥미로움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 나오는 에너지가 놀라웠다.


  유방암에서 전이되어 폐암까지 가지고 있는 그녀는 몇 년 전에는 희귀병에 걸려 목 아래로는 마비가 왔다. 의사는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거라고 했지만, 강인한 그녀는 집중 치료 후 기적적으로 다시 걸을 수 있었다.  

‘정신은 멀쩡한데, 남들한테 배변 보는 것까지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게 얼마나 굴욕적이던지…’ 병상에 있던 자신을 정성껏 돌봐 주던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감사를 전하며,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라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든다. 

‘내가 다시 걷게 된 건 기적이야. 내가 십 년 넘게 매일 수영을 했다고. 그래서 다행히 견딜 수 있었던 거 같아. 너도 절대로 운동을 거르면 안 돼.’

 그녀는 크리스마스가 한 달도 훨씬 넘게 남았을 때부터,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만든다며 형형색색의 천 무더기를 보여준다. 

‘이건 로비를 위한 티셔츠, 알렉스는 내가 만든 바지를 좋아하지. 이것 봐 내 딸이랑 손녀에게 줄 세트 파자마야 너무 이쁘지 않아? 줄리는 토끼 무늬를 좋아하고, 엘리스는 사과 무늬를 좋아해. 이건 존의 손녀에게 줄 선물이야.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원피스 잠옷이랑 어깨끈이 달린 베개커버야. 자… 이렇게 어깨에 매면 가방으로 쓸 수 있겠지?, 내가 레오에게 줄 티셔츠를 만들 이 천을 봐. LEO 그러니까, 사자무늬야.’

수십 개가 넘는 작품들을 누구에게 줄 것인지, 왜 이 천을 골랐는지… 얘기해 주는 그녀는 정말 신나 보였다. 하루를 꼬박 걸려 재단하고, 이제 재봉틀을 돌릴 일만 남았다며 까르륵 웃으신다.

‘도대체 어떻게 이걸 다 만들어요?’

‘얼마나 재미있는데, 그리고 나는 선물은 꼭 만들어 줘. 우리 엄마한테 배운 거야. 내가 만든 선물을 준다는 건 그걸 만들 동안 그 사람을 생각한 내 시간을 준다는 거잖아. 그건 돈 보다 더 중요한 거야.’


 프란체스카는 말하자면 금수저였다. 아버지는 치과의사였고, 어머니는 간호사였다. 하지만 치과 의사인 아버지는 돈을 받지 않고 치료를 해 줄 때가 많아서, 그녀는 좋은 교육을 받을 수는 있었지만 돈을 걱정 없이 쓸 만큼 부자였던 적은 없다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돈 없는 사람들은 무료로 치료를 해주고, 그 사람들은 달걀이나 과일 같은 걸 치료비로 내놓곤 했다고 했다. 그녀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흥미로운 일들을 하고 있었다. 

‘My family is barking mad!.’ (우리 가족들은 정말 미쳤어. )

근데 나는 그게 좋아. 평범한 건 지루하잖아. 하고 까르르 웃는 그녀가 너무 멋지다. 나는 늘 그녀의 열정을 닮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를 멋진 동네 이웃으로만 알아 가다, 남편이 베트남으로 발령이 났다. 베트남에는 지금 한국 아이들은 많고 학교의 수가 적어 입학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여태껏 한국으로 복귀하는 줄 알고 영어를 굳이 강조하지 않았다. 다만 호주에서 즐겁게 생활하고,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만 느끼고 돌아가자. 공부는 한국에 가서 아이가 심리적으로 안정된 후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베트남 학교에 가기 위해 국제학교 입학시험을 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컴퓨터로 보는 영어나 수학 시험은 어떻게든 치겠지만, 영어 인터뷰와 라이팅도 시험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낭패다. 

 제일 먼저 생각난 체카를 찾았다. 

‘별이를 좀 도와줄래요?’

체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물론이야!

 하지만 두 가지 조건이 있다고 했다.

‘별이 본인이 원해야 해.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서로의 시간을 낭비할 뿐이야. 나는 늙은 사람이야. 내게 시간은 아주 소중하다고. 많지 않거든.  그리고 수업료는 받지 않겠어.’

‘하지만, 체카…. 소중한 시간을 내주시는 거잖아요. 수업료는 내게 해주세요.’

‘아니, 별이가 중요해. 이게 중요한 문제야! 나는 충분한 돈이 있어. 별이를 도와주면 내가 행복할 거야.’

그녀와 수업을 할지 말지 별이가 결정해야 했다. 내켜하지 않던 별이를 데리고 체카 집을 처음으로 찾았던 날, 체카는 별이에게 말했다.

 ‘네가 영어로 말하기 힘들게 하는 어떤 문제가 있을 수도 있어. 그건 괜찮아. 나는 도움이 필요 한 아이를 아주 많이 만났거든. 넌 대신 좋은 기억력이나, 창의적이거나, 사물을 보는 눈이 남다를 수 있어. 하지만 기억해… 네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남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은 중요한 거야.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네 머리에 있는 박스에 사회적인 약속을 담아 둬야 돼. 그렇지 않으면 혼란스러워지거든, 필요 없는 오해를 사기도 하고 말이야. 그리고 영어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면 네가 성공하는데 도움이 될 거야. 네가 원하면 내가 도와줄게. 하지만 원하지 않는다면 시작하지 않는 게 좋아.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도록 하자’ 


 그렇게 별이는 매주 화요일 체카네 집을 찾는다. 그녀가 언제나 그랬듯이. 복도 가득 걸려 있는 가족과 친구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해 주었다.  별이는 그 이야기가 흥미로웠는지, 집에 오면 흥분한 목소리로 내게 전해주었다. 별이의 소근육이 덜 발달되었다는 걸 눈치챈 그녀는 함께 만들기 작업 등을 하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체카는 별이의 바디랭귀지를 용납하지 않았다. 별이는 학교에서 말은 하지 않아도, 체카에게는 말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별이가 하는 어떤 엉뚱한 말도 진지하게 또는 재치 있게 받아주었다. 체카는 별이에게 영어로 말하기 싫으면 본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둘은 함께 강가를 걸으며, 체카의 개 카샤를 산책시켰다. 별이는 카샤에서 명령을 내리고 복종하면 젤리를 보상으로 주며 처음으로 개와 친해지는 기쁨도 누렸다. 


  별이가 다녀간 다음 날 즈음이면 나는 정원에서 꽃 한 다발을 잘라다가 그녀에게 가지고 간다. 그녀는 기뻐하며 차를 내온다. 차를 마시다 내가 별이에 대한 이야기나,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먹어가는 내 이야기를 하며 앞으로의 걱정이나 답답함을 내비치면 그녀는 

‘Do not despair darling’ (절망하지 마.) 하면서 미소를 짓는다. 

의사들이 뇌 반쪽이 없어서 평생 말을 할 수 없을 거라고 한 로비가 얼마나 말을 잘하게 되었는지, 의사들이 7살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한 그가 얼마 전  40살 생일은 맞은 건 기적이 아니겠냐며.

‘Everything is going to be okay. Just keep going. ’ (다 잘될 거야. 그냥 앞으로 나아가)

'도대체 어떻게, 풀타임으로 일을 하면서 혼자 네 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석사, 박사과정을 다 끝낼 수 있었어요? 내가 정말 게으른 사람처럼 느껴져요.'

'Teaching is my craft!. (가르치는 게 내 업인걸.) 잘하고 싶었어. 우리 아이들과 나는 아주 좋은 팀이었어, 너와 아이들도 그럴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 9시가 되면 내가 공부해야 한다는 걸 아이들은 알았어.'

다른 사람들이 건넨 다 잘 될 거라는 말은 나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연기처럼 나를 잠시 감싸다가 곧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체카의 말은 달랐다. 작은 몸으로 친절하지 않은 세월을 겪어낸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와 말은, 그녀의 삶은 내 마음에 꼭 심어져 사라지지 않았다. 


  화요일 늦은 오후가 되면 별이는 브라우니며, 커스터드 슬라이스, 아몬드 슬라이스를 잔뜩 가져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 앞에 내놓는다. 

 ‘엄마가 엄청 존경하는 체카 박사님하고 수업하고 오고 너 정말 멋지고 부럽다’며 엉덩이를 툭툭 쳐주면 별이는 어색함과 뿌듯함이 섞인 미소를 짓는다. 덕분에 화요일 오후 티타임이 근사해졌다.


체카. 카샤. 별이



이전 14화 미안하다고 하지 마! 자존감 키우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