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제일 드라마틱하게 깊은 수렁에 빠졌던 그시기를 견뎌내며 '에라 모르겠다. 이미 망한 인생. 재미있게나 살아 보련다'며 나 자신을 세상에 던져 놓았다.
I put myself out there.
아장아장 베이비 스텝.
이미 망한 인생 두려움은 개나 줘 버리고 도전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 내가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도 꾸준히 하면 언젠가 이루어진다'는 걸 배웠다.
호주 할머니들과 재봉틀로 옷 짓기, 피아노 치기, 테니스, 양떼와 소떼가 출몰하는 시골 비포장 도로 운전하기, 바다 수영하기, 낚시해서 회 떠먹기....
호주 철물점에서 일하며 열쇠 깎기, 페인트 조색, LPG 가스 충전 등 내가 할 일이라 생각해 보지 못한 일도 해 봤다.
" Women can do anything, aye?" 요즘 세상에 여자라고 못 할 일이 없다.
땅바닥까지 나를 내려놓았으니 누구에게도 장벽을 치지 않았다. '나도 힘들다, 너도 힘들지?'
그랬더니 호주 시골 마을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우리 마을에 놀러 온 친구는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거의 모든 사람과 인사와 안부를 나누는 나를 보며 '혹시 시장 선거 나가?'라고 물을 정도였으니...
요즘 재미있게 보고 있는 <갯마을 차차차>의 홍반장 등장 씬을 보며,그 시골 마을의 철물점에서 일하며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오지랖을 떨어내던 내가 오버랩됐다.
나는 <호주 시골 이반장?>
같이 먹고 마시고 얘기하고 놀고 웃고 울고,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를 나누며 산불과 코로나라는 재해까지 함께 겪으며 나는 그들과 일종의 동지애마저 생겨 버렸다.
그들과 헤어지는 게 얼마나 아쉬웠으면 한참 동안이나 마음속 한 구석이 비어 버린 듯 헛헛했다.
그 헛헛함을 <호주 시골에서 아이와 3년> 책을 쓰며 채웠다.
다시는 헤어지는 인연은 만들고 싶지 않아 블로그에 집을 지었다. 지구 어디에 살든 똑똑 문을 두드리면 밀크티를 나눠 줄 수 있는 체카를 만나고 싶고, 나 역시 그들의 체카가 되어 주고 싶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행복한 사람은 일기를 쓰지 않는다는데, 그래서인지 한 동안이나 일기를 쓰지 않았다. 굳이 키보드로 게워내야 할 만큼 앙금이 쌓이지 않았기 때문일까?
헌데, 하노이 봉쇄로 외출도 못하고 아이들과 집 안에서만 지낸 지가 벌써 다섯 달째다. 답답함이 쌓여 간다.
결국 며칠 전 아침에는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 비디오를 켜 놓고는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요가 매트 위에서 헤드뱅잉을 하며 방방 뛰면서... 이 구역의 미친 아줌마가 따로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너바나는커녕 락음악을 별로 들은 적이 없다. 보사노바 리듬에 몸이 살짝 흔들리는 정도가 더 좋았다.
그런데 집콕 5개월에 게임에만 몰두하는 첫째 별이랑,맘이 잘 맞아 내 인생의 위안이었던 둘째 달이 너마저도... 중 2구나. 두 아이와 집콕 중 서로 부딪힐 일이 많으니 나도 사춘기 소녀로 다시 돌아가는 듯하다.
호르몬이 널을 뛰고 속에 화가 쌓이고, 집 안에서 얼굴을 24시간 마주하며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니 앙금이 쌓인다.
베트남으로 온 지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다행히 아이들은 원하던 학교에 입학하고나도 재미있는 거리들을 많이 찾아 하루하루를 바쁘게 채워 가고 있었으므로해피 엔딩인 줄 알았는데...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듯하나의 근심이 풀리면 다른 근심의 매듭이 생기는 법이다.
그런데도, 나는 어쩔 수 없는 긍정주의자인지 단지 기억력이 나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저질 체력만큼이나 화의 끈을 쥐고 있을 힘마저도 저질인 것인지, 두 사춘기 아이와 감정의 널을 뛰다가도 하루를 마무리하며 자리에 누우면 침대 맡 아이들 어린 시절 사진에 빙그레 미소가 그려진다.
너희를 키우며 엄마는 참 행복했거든.
Persevere darling.
인내하렴 얘야.
하루를 꼬박 비행기를 타고 가야 만날 수 있을 호주 시골 마을의 체카와 페이스북으로 얼굴을 보며 티타임을 가질 수 있는 좋은 세상이다.
호주 시골 마을 철물점에서 일하며 텃밭에서 닭을 키우던 아줌마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