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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Writes Feb 06. 2020

아줌마가 피아노를 배울 수 있을까?

호주 시골에서 3년

 어떻게 양 손이 각각 따로 움직이며 소리를 낼 수 있지?? 중학교 때 피아노를 잘 치는

친구가 있었다.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고 양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아름다운 소리로 강당을 가득 채우는 친구가 그렇게 신기하고 멋지게 보였다. 

‘너, 언제부터 피아노 배웠어?’

‘글쎄, 5살 때부터 인가?’

 ‘난, 너무 늦었구나.’ 

중학생 때 나는 피아노를 배우기에 너무 늦고 늙었다고 실망했던 순간이 25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는 리코더를 제외하고는 악기 하나 연주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약 사십 년을 살았다. 호주에서 기약된 3년의 기간이 다 지나가면서, 한국에 이제 돌아 가면 마흔이 다 된 아줌마는 무엇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러다, 호주 시골 생활이 1년 더 연장되었다는 소식을 남편에게 전해 들었다.  이상하게도 25년 전 그 순간이 생각났다. 여기서 그저 늙어만 갈 수는 없었다. 온라인 악기상에서 전자 건반을 주문했다. 


  눈을 감고 피아니스트처럼 흰건반 검은건반을 물 흐르듯 왔다 가는 시늉을 해봤으나, 학교종이 땡땡땡도 양손으로 칠 수가 없었다. 유튜브에는 나만 따라 하라는 강의가 가득했지만, 손이 따라 움직여 주지 않는데 머리만 더 복잡해졌다. 유튜브는 밀쳐두고, 내가 치고 싶은 노래의 악보를 구했다. 버터플라이 왈츠와 센과 치히로의 모험의 ‘언제나 몇 번이라도’가 치고 싶었다. 한 마디씩 나누고 날짜를 매겼다. 욕심부리지 않고 하루에 한 마디만 외웠다. 다음날에는 하나 더, 그다음 날에는 하나 더 노래 하나 배우는데 2주 정도가 걸렸지만, 못 치는 거 보다는 낫지 싶은 마음이었다. 물론 손가락으로 건반을 찾아 갈 수 있다고 연주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소리를 낼 뿐이었다. 한달 쯤 그랬을까, 그러던 어느 날, 참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 정도 손가락 자리가 몸에 익혀 지자, 저절로 피아노가 쳐지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이걸 치고 있는 거지? 채 생각도 하기도 전에 몸에 기억된 습관으로 내 손가락은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어찌나 신이 나던지, 같은 노래를 치고 또 치고 아이들이 집에 올 때까지 몇 시간이나 한 노래를 계속 쳤다. 악보 없이 노래 하나를 다 칠 수 있게 되자, 그 후부터는 음악을 가지고 조금은(전문가들이 보기에는 한심한 수준이겠지만, 나에게는 벅차고 신나는 경험이었다) 놀 수 있게 되었다. 감정을 넣어서 연주하는 건 이런 거구나, 느리게도 쳤다 빠르게도 쳤다, 내가 무대에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된 양 몸을 앞뒤로 흔들어 가며 키보드를 가지고 놀았다.  

 

 그렇게 놀다 보니, 한 달에 한 곡 정도, 악보를 보지 않고 칠 수 있는 몇 개의 레퍼토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누구 앞에서 연주를 해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시드니에 갔을 때, QVB (퀸 빅토리아 빌딩, 고풍스러운 옛 건물의 중간층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어, 누구든 연주할 수 있다.)에서 배낭을 메고 자유롭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관광객이 그렇게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나도 거기서 연주를 해 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마침 2019년의 크리스마스 휴가를 시드니에서 보낼 수 있었다. 피곤해서 쉬고 싶어 하는 가족들은 숙소에 두고 혼자 QVB를 찾았다.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휘황 찬란하고, 큰 건물을 꽉 채운 사람들 앞에서 주눅이 들었다. 나는 남 앞에 나서길 즐기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이 시드니를 방문하는 마지막 기회다. 어쩌면 평생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 거야. 후회하지 않겠어?


 눈을 질끈 감고 의자에 앉아서 건반을 만져 봤다. 이상하다. 피아노는 더 큰데, 건반들 간 크기는 집에 있는 키보드보다 더 좁아 보인다. 조심스럽게 버터플라이 왈츠를 쳐본다. 날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심장이 두근댄다. 집에서 몇백 번은 쳐 보았을 이 노래가, 낯설다. 페달을 밟아야 한다던데… 어떻게 밟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끝까지 마무리를 했다. 엉망진창 한 노래가 끝나자, 어디서 용기가 생겼는지 캐논도 쳐본다. 역시 손가락이 꼬인다. 나는 초보라고 쉬운 버전 악보를 받아 익혔는데, 남들 앞에서 연주하니… 괜히 부끄럽다. 어려워도 원본을 익힐 걸 하는 생각이 그 순간 뇌리를 스친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두리뭉실 마무리를 하고 도망치듯 지하로 내려와 바로 옆 웨스트필드로 향했다. 거기에 태국 쏨땀을 먹을 수 있는 데가 있다. 혼자서 태국 고추가 잔뜩 들어가 머리가 얼얼해지는 달고 짠 솜땀을 밥도 없이 정신없이 퍼먹고 나서야 마음이 좀 진정 됐다.

‘엉망이었어. 그래도 후회는 만들지 않았어.’


 나중에 한국에 가서 기회가 된다면 진짜 피아노로 페달을 밟으며 제대로 한번 배워 보고 싶다. 어쨌든 지금도 나는 피아노를 연주하며 충분히 행복하고, 치유받고 있다. 


 며칠 전에는 요즘 시간이 바빠 통 못 갔던 화요일의 바느질 모임에 갔다. 백 년도 넘은 오래된 마을 홀에는 비슷한 연도일 것으로 보이는 튜닝도 제대로 되지 않은, 건반도 몇 개 부서진 피아노가 있다. 화장실을 다녀오며 괜히 뚜껑을 열어 한두 마디 쳐보고 돌아왔더니, 바느질하시던 할머니들이 

‘듣기 좋더라, 괜찮다면 우리를 위해 한 곡 쳐주지 않겠어?’

다시 말하지만, 나는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있으면 손사래도 치면서 극구 사양을 했다. 하지만, 이제 뭐 어때 하는 마음이 좀 생겼다. 

‘잘 못 치지만, 해 볼게요.’

오래되고 튜닝이 잘 되지 않은 피아노 소리가 지붕이 높은 시골의 오래된 홀을 채운다. 삐걱거리는 소리, 바람소리. 아마추어의 연주. 무엇하나 제대로인 게 없지만, 그냥 참 좋다. 잘 연주하지도 못하면서 또 아름다운 음악의 치유를 느낀다. 

마무리하고 오니, 점심 식사 후 차 한잔을 앞에 놔두고 계신 할머니들이 

‘피아노는 언제부터 쳤어? 참 아름다운 연주였어.’라고 진심으로 좋아해 주신다. 

‘작년부터 쳤어요.’

‘어른이 되어서 배우는 데, 어렵지 않았어?’

‘너무 어려워서 하루에 한 마디씩 밖에 익힐 수가 없었어요. 악보를 읽을 수 있었지만 동시에 칠 수는 없어서 그냥 무식하게 하루에 한 마디씩 외울 수밖에 없었어요.’

‘참 잘했구나, 넌 참 똑똑한 아이야. 아름다운 연주 고마워.’

언제나 진심으로 칭찬해 주고, 실수에 관대한 호주 할머니들. 여기 있어서 참 좋았다. 나도 그동안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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