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것보다 더 힘든 일

by sunzero

일본행을 결정했을 때 제일 걱정했던 부분이 뭐였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병원이었다. 일본어가 서툰 외국인이 타지에서 아프면 어떻게 될까, 어른은 드럭스토어 약으로 해결한다고 해도,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열에 시달리다 응급실을 찾아야 하거나, 사건사고로 수술을 해야 하는 큰일이 벌어진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끔찍한 일을 상상하니 몸이 굳어서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 할수록 한국에 있는 것이 최고였으니까.


하지만 내가 생각한 최악의 상황은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고, 최악보다는 차악 정도는 벌어질 수 있기에, 일단 한국에서 준비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준비하기로 했다. 평소 다니던 가정의학과와 이비인후과에 들러서 상황을 말했다. 신경성 위염이 있는 나는 위염 약을, 알레르기 비염으로 코와 눈이 따가운 아이는 알레르기 약과 안약을 처방받았다. 그러고도 조바심이 일어서 약국에서 종합감기약과 소염진통제, 해열제, 연고, 밴드, 1회용 식염수 등을 샀다. 비닐봉지 가득히 약을 들고 집에 온 나를 향해 남편은 이 약을 1년 동안에 다 먹을 수는 있냐고 물었다. 나는 약을 다 못 먹어도 괜찮으니 아프지나 말았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약값이 아까워서 아프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게 준비를 해서 일본에 왔지만 병원에 가야 할 일은 생기고 말았다. 여름더위가 한창이던 7월 아침, 나와 남편은 비슷한 증상으로 눈을 떴다. 둘 다 목이 붓고 코가 막혀서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에어컨의 찬 공기 때문인지, 여름휴가 때 축적된 피로 때문인지, 혹은 렌터카의 청소 안 된 에이컨 필터와 먼지 때문인지. 이유를 떠올려봤지만 명확하게 집히는 것이 없었다. 전부 다 인 것도 같고, 전부 다 아닌 것도 같고. 미리 사 두었던 종합감기약을 먹고, 따뜻한 물을 자주 마시며, 코 세척을 하고, 가글을 열심히 할 뿐이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는데도 통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병원을 가야 할 상황이었다. 한국에 있었다면 바로 이비인후과로 달려가서 항생제를 받아왔겠지. 이 정도 인후통이면 분명 항생제를 먹어야 할 테니까.


병원에 가야 할 상황이 맞는데, 문제는 어느 병원을 가야 하는지 모른다는 거였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슈퍼에서 물건을 사며,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는 건 서툰 일본어와 손짓발짓으로 가능한데, 병원은 처음이었다. 구글맵을 통해 찾아보니 무서운 의사 선생님에 대한 후기가 많았다. 일본어가 안 되는 외국인이 병원에 갔다가 괜히 안 해도 되는 검사를 하는 건 아닌지, 불친절하게 대해서 줘서 상처만 더 받는 건 아닌지. 아, 다시 걱정이 샘솟았다.


그러다가 구글맵에서 집 근처 이비인후과를 발견했다. 여자 의사 선생님께서 외국인에게 영어로 설명해 주신다는 후기가 있었다. 진단과 처방도 정확하다는 문구에 마음이 솔깃했다. 그래, 가보자. 이대로 병을 더 키울 수는 없다.

나와 남편, 아이(아이는 안 아프지만 혼자 집에 둘 수 없으니까)는 지하철 역 근처 이비인후과로 갔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아픈 목 보다 가슴이 더 뛰는 것 같다. 쭈볏쭈볏 데스크 앞에 다가가니 무슨 일이냐고 물어본다.

“스미마세. 와타시와 칸코쿠진데스. 니혼고가 헤타데스(すみません。私は韓国人です。日本語が下手です。)”

서툰 일본어로 말하고는 스마트폰에서 번역기를 꺼냈다. 데스크에 앉아있던 간호사분이 미소를 보이시고는 함께 스마트폰 번역기를 꺼내셨다.


그다음부터는 척척척! 진행되었다. 가지고 간 의료보험증과 재류카드를 내고, 문진서를 작성하고, 접수를 했다. 대기실에 앉아 있다가 차례대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접수를 도와주셨던 간호사분이 진료실에 들어오셔서 우리 상황을 일본어로 설명해 주셨다. 의사 선생님이 ‘곤니찌와’ 하고 인사하시고는 번역기에 대고 이야기를 해 주셨다. 즉석에서 한국어로 번역되는 내용을 보면서, 나와 남편은 안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 오기를 그토록 주저했는데, 이렇게 다 도와주시는구나, 싶었다. 예상대로 인후염이 심해서 항생제를 5일간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병원 진료를 받고 계산을 했다. 데스크 앞 간호사분께 나는 “혼토오니 아리가토오고자이마스(ほんとうに、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처방전으로 들고 아래층의 약국으로 갔다. 역시나 이곳에서도 나를 보고는 일본어가 편하냐, 영어가 편하냐, 하고 물으셨다. 영어라고 답하니, 영어로 써진 문진표(약국에서도 문진표를 또 작성해야 한다.)를 주셨다. 한참을 기다려서 약을 받았는데 약에 대한 설명도 전부 영어로 해 주셨다. 손짓과 몸짓을 더한 간단한 영어는 내가 이해하기에 딱 적합했다. 역시나 약국 문을 나오면서 나는 “혼토오니 아리가토오고자이마스”라고 말했다.


그렇게 첫 병원 방문을 하고 돌아왔다. 한국보다 병원 절차가 복잡하고, 대기 시간도 길었다. 현금만 받는 병원이어서 가는 길에 ATM기에서 현금을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하지만 외국인에게도 친절한 의료진 덕분에 잘 다녀올 수 있었다. 물론 처방받은 약을 먹고 나니 인후염은 말끔히 나았고 말이다.

아직도 집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약들이 많이 남아있다. 감기 기운이 있는 밤이나, 소화가 안 되는 날에는 그 약들을 먹는다. 틈틈이 드럭스토어에서 좋다고 소문난 파스와 밴드도 사놓았다.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음에도, 언제가 아플 날을 대비하기 하기 위해 준비한다. 이렇게 준비해도 감기는 또 걸릴 수 있고, 목은 아파서 항생제를 먹어야 할 수 있겠지만. 그러면 그때에는 주저 없이 스미마셍, 하면서 이비인후과 문을 열어야지. 내 얼굴을 알게 된 간호사 가 스마트폰 번역기부터 찾으실 테니까. 이렇게 현지 적응력이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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