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랑 통역되나요?'를 보고..

'나는 사랑받을 수 없어' 비합리적 신념에 대하여.. (스포주의)

by 그리움


워낙에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의 조합이라 기대하며 시작했는데, 단순한 멜로일 줄 알았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놀라며 끝까지 몰입하게 되었다. 하루 만에 정주행을 마쳤고, 반복해서 정주행 중....



여주인공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엄마와, 자신을 끔찍이 여기던 친척 집에서 자라오면서 ‘나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나는 절대 사랑받을 수 없다’는 끝없는 자기비판과 자기혐오 속에서 살아왔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성공가도를 달리고,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도 자신을 좋아한다는 환희의 순간 앞에서도 자기혐오 도식이 발현되면서 도망치게 된다. 결국 그녀는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악플을 달던 존재, ‘도라미’를 분리해내고 망상에 그치지 않고 다중 인격으로 불러오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도라미가 단순히 주인공을 괴롭히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주인공이 하지 못했던 일을 대신 해주며 상처에서 벗어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이 드라마 전반에 걸쳐 펼쳐진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그 곁을 지켜주는 한 사람(남주)의 역할이다. 그는 여주인공의 아픔과 숨기고 싶은 면을 알게 되면서 점점 끌리게 된다. 이 관계는 현실 세계에서는 위험할 수 있는 서사지만, 드라마 속에서는 치유적으로 그려진다. 덕분에 시청자인 나 역시 마음이 뭉근하게 따뜻해지는 경험을 했다. 결국 이 작품은 단순한 멜로를 넘어, 상처와 치유를 다루는 이야기로 잘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EC%9D%B4%EC%82%AC%ED%86%B5.png?type=w773



내가 생각하는 하이라이트 장면은 9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여주가 분리해버린 ‘도라미’가 남주에게 여주가 절대 밝히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 이야기, 결국 다중인격을 만들게 된 시발점의 사건을 털어놓는 장면이다. 부모의 죽음의 사건에 대해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하였지만 사실 여주는 기억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아빠를 죽이고 자신까지 죽이려 했던 것,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자신을 아무도 사랑해 주지 않으리라고 여기며 살아온 자신의 아픔을 남 얘기인 듯, 하지만 자신의 고통의 절규와 같은 고백을 하는 도라미를 남주가 꼬옥 끌어 안아주는 장면은 보고 또 봐도 눈물이 흐른다. 그 순간은 도라미가 사라지는 진정한 치유의 순간으로도 작용하게 된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도식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의 심리적 문제에 매우 크게 기여하는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어린 시절의 여러 아픈 경험들로 ‘난 사랑받지 못해’, ‘난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그 누구도 있는 그대로의 날 사랑하지 않을거야’와 같은 도식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었다. 그래서 이런 장면들을 보면 더 눈물이 멈추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모름지기 ‘사랑’으로 살아가는 존재인듯 싶다. 일용할 양식이 우리를 배부르게 하고 신체를 자라게 할지는 몰라도 온전히 나의 존재를 수용 받는 경험, 나의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사랑받는 경험이 없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닐 때가 많다. 인정받기 위하여,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끝없이 나의 존재를 수용 받기 위하여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끝없이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러한 노력이 무산되는 경험, 즉 나의 존재를 외면당하고, 거절당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경험들이 축적될수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 안에는 강한 도식이 자리잡게 된다.


‘난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야’.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난 필요 없는 존재야’, ‘내가 사라져도 아무도 걱정하지 않아’.



인지행동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자동적 사고, 핵심 믿음(스키마) 또는 비합리적 신념이라고도 부르는데, 우리가 경험하는 특정 상황에서 이러한 잘못된 신념과 도식이 발동하면 드라마의 여주인공처럼 그 상황을 회피해 버리거나, 내가 가진 도식으로 결론을 짓고 행동을 하게 되거나, 심각할 때는 해리성 기억상실 또는 인격을 완전히 분리시켜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 잘못된 도식을 발견하고 그것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것, 그것에 대해 충분히 반박하고 깨주는 것, 결국은 ‘나’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존중해주는 경험이 산산조각난 그 마음을 치유하는 중요한 과정이 된다.



내 주변에서는 도저히 그런 사람을 발견할 수 없을 때, 부모에게조차 그런 사랑을 충분히 느끼지 못했을 때 우리는 신을 찾거나, 내 비어버린 마음을 채워줄 사람을 찾거나, 상담가와 같은 전문가를 찾아가기도 한다. 그런 존재들을 통하여 나의 비어버린 마음의 탱크가 채워지기라도 한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더 공허하고 잘못된 방법으로 (가스라이팅, 억압, 폭력 등) 채워진다면 더 심각한 방향으로 나의 존재를 채우게 될지도 모른다.



드라마는 역시나 아름답게 전개되고 결말에 도달한다. 그저 아름다운 모양으로 풀어냈을지라도 그 안에서 대리만족 또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그런 사랑을 소망하고 꿈꾸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존재가 있으면 좋겠다.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 내가 나자신을 혐오하고 비판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그 순간조차도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해주는 사람. 그저 ‘괜찮다’, ‘넌 충분히 사랑받을 만하다’, ‘넌 그럴 자격이 있다’라고 지치지 않고 말해줄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사람은 쉬이 지치고 쉬이 좌절하고 분노한다. 아무리 사이좋은 커플일지라도 이러한 일이 반복된다면 상대방은 충분히 지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내어 그런 사랑을 충분히 주고 받는 경험을 하기를.... 결국은 나 자신을 내가 끌어안아야 하겠지만 그러기까지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길. 내 옆 사람을, 내 가족을, 나의 친구를 그렇게 꼭 끌어 안아줄 수 있는 충분히 건강하고 마음 깊은 사람들이 되길....바라본다.




작가의 이전글우리의 힘겨운 나날들이 그저 영화의 몇 장면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