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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곰 Nov 11. 2019

편견 있는 인종차별

지인들이 나에게 한 목소리로 물어보는 게 있다. 프랑스에 살면서 인종차별을 받아 본 적이 없었냐는 질문이다. 프랑스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어떻게 홀로 고군분투하며 사는지 궁금했었나 보다. 또 유럽 여행을 좀 다녀온 어떤 지인들은 여행 중 자신이 인종차별을 겪었다고 말하며 '나는 프랑스가 너무 싫어!' 혹은 '나는 프랑스는 무서운 나라야!'라고 딱 잘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질문에 크게 공감을 해서 대답해주지는 않는다. 자신들이 겪었던 일에 무조건 위로해주려고 하지도 않는다. 인종차별은 매우 예민하고 어려운 주제이며 한 마디로 명쾌하게 대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프랑스에 인종차별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없다는 말로 대화의 포문을 연다.


차별의 개념을 한 번 생각해보자.

인종 차별이 도대체 뭐지

나는 먼저 인종 차별이 무엇인지부터 생각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당연히 인종 차별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조롱하는 행위다. 더불어 단순히 싫어서 하는 행위와, 호감이 있어서 하는 행위까지도 포함한다. 유엔에서는 매년 3월 21일을 세계 인종차별 철폐의 날로 지정했고 유럽 연합 의회에서는 유럽인종차별위원회를 만들어서 이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누고 예방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사실 오래전 유럽은 이미 여러 민족이 섞여 살았기 때문에 인종과 민족적인 이유로 차별이나 갈등은 거의 없었다. 물론 프랑스의 골족과 독일의 게르만족의 갈등은 오랜 시간 서로 조롱했지만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다는 식의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과 같이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종 간의 계층이 생긴 건 대개 유럽의 대항해 시대 이후에 성행한다. 유럽의 대부분 나라들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까지 진출하면서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여러 이유로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대륙의 사람을 하등 민족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특히 흑인들을 노예로 이용하면서 사람대접은커녕 그저 집안의 재산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시대가 끝난 지 겨우 백 년도 되지 않았으니 유럽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우월감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최근 프랑스에서 가장 크게 대두되고 있는 문제는 시리아를 포함한 중동지역과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로 넘어온 난민들에 관한 것이다. 찬성하는 쪽은 프랑스 사람들과 외모와 언어 등 모든 것이 다르다고 차별해서는 안된다며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난민들을 받아줘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에 반대하는 쪽은 난민들이 프랑스에 정착할 때까지 누가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주냐에 문제에서부터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프랑스 사회에 피해만 끼칠 수 있다는 의견 등이 난무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난민 수용 문제에 인종 차별적 의견이 껴들어갔다. 난민 수용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우수한 프랑스 사람들이 모든 면에서 현저히 떨어진 난민들을 적극 수용해서 교육시키고 잘 살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는 의견을 내고 있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들만 잘 살아야지 왜 다른 민족이 자기네 사회에 끼어드냐고 말한다.


누가 그랬다. '함께 사는 건 기적'이라고.


우리 안에 존재하는 차별

일상생활 속에선 이렇게까지 인종 차별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차별'이라는 행위가 어떤 형태로든 비일비재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도 프랑스에서 한국인으로 홀로 살아가면서 무수한 차별 대우를 받는다. 비단 인종 차별뿐만 아니라 언어의 부족함에서 오는 차별도 있다. 프랑스어를 잘 못하기 때문에 집단에 껴주지도 않고 말도 안 걸어주는 경우 같은 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동아시아 사람을 보면 당연히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중국말을 하는 사고방식이 유럽 사회에 뿌리내렸다. 내가 길을 걷다 보면 십 대에서부터 노인들까지의 수많은 프랑스 사람들이 중국말 '니하오'로 나에게 인사한다. 프랑스에서의 첫 해에는 이 경우를 굉장히 싫어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인종차별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양쪽 눈을 찢으면서 비웃기까지 하는 날엔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오르기도 했다. 가끔은 내가 한국인이라고 따지면 '어떻게든 말을 걸고 싶은데 중국말밖에 몰라서 니하오라고 말했다'는 사람들도 더러 봤지만 비겁한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차별을 느낄 때 감정적으로 다가가지 않으려고 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베트남 친구가 나에게 한 말이 계기가 되었다. 어느 날, 그 베트남 친구와 같이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프랑스 사람이 우릴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역시나 중국말로 인사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억한 심정에 따지려고 했지만 베트남 친구는 그냥 무시하라며 나를 말렸었다. 그는 이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분 나쁘지? 당연히 그럴 수 있어. 그런데 너희 한국 사람들도 인종 차별을 하고 있잖아. 나는 동남아 사람들이 한국에서 얼마나 안 좋은 대접을 받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 나는 한국과 일본이 우리와 완전히 다른 나라라서 아시아가 아니라고도 생각해." 나는 굉장히 놀랐었다. 정말 맞는 말이었다. 우리나라 뉴스에서 수없이 봤던 외국인 노동자 문제들이 생각났다. 게다가 나 자신도 알게 모르게 동남아 사람들을 무시했었던 기억까지 떠올랐었다. 우리는 정말 아무런 편견 없이 외국인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걸까.


한 물줄기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물처럼 우리는 서로 다르다.

다름의 두 가지 얼굴

 '우리가 차별을 했으니 우리도 차별을 받는 건 당연한 거야'라는 논리는 절대 아니다. 차별은 어디에서든지 일어날 수 있고 우리도 알게 모르게 차별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거다. 그래서 나는 지인들에게, 혹시라도 여행 중에 인종차별을 받게 된다면 어디에든지 존재하는 그 차별에 큰 대응을 하지 말고 그러려니 넘어가라고 충고해준다. 더불어 차별은 극히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행해지는 일이라는 말도 해준다. 우리가 차별이 잘 못 됐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많은 외국인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혹시라도 '당신에게 말을 걸었는데 왜 무시하냐'라고 따지는 외국인을 만나거나, 또 식당에서 아시아인을 안 받아주기도 하고 받아주더라도 바가지요금을 청구하는 일도 겪을 수도 있다. 분명히 그런 사람들은 현지인들에게도 크게 환영받지 못한다. 


나는 프랑스에서 분명한 이방인이다. 모든 것이 다른 한 사람으로 여기서 살고 있다. 가장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도 성격과 취미 생활 심지어 말투까지도 다르기에 해외에서의 삶 또한 모든 게 다를 수밖에 없다. 거기서 오는 어려움은 누구의 몫도 아닌 나의 몫이다. 그런데 많은 프랑스 사람들이 그 몫을 함께 짊어주고 나와의 다른 격차를 좁히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다름'을 통해 차별도 받았지만 프랑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연대성 그리고 다른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고자 하는 여유로움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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