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는 4월만 되어도 무척이나 덥다. 연중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와 북쪽에서 내려오는 미스트랄 바람이 프로방스 땅을 쉽게 달군다. 지난 여름에는 45도까지 치솟았는데 한국 뉴스에 나올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큰 이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에 사는 프랑스 사람들은, 특히 북쪽에 사는 프랑스 사람들은 프로방스에서의 삶을 무척이나 부러워한다. 아무래도 북프랑스는 햇빛 일조량이 너무 적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프랑스 북서쪽에 위치한 앙제(Angers)에서 어학을 공부할 때도 최대 1주일간 해가 구름에 가려져있기도 했었다. 그래서 매년 여름이 되면 북프랑스 사람들은 햇빛과 함께 휴가를 보내려고 프로방스를 찾는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땡볕 더위에도 불구하고 꼭 가는 곳이 있는데 바로 프로방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라벤더 밭이다.
사실 프로방스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라벤더의 시작이 봄이라고 말한다. 봄이 되면 집집마다 마당에 심어져 있는 라벤더의 새잎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초 여름이 되면 꽃대가 올라온다. 나는 이 시기에 산책하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라벤더의 향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을 타고 내 코를 감싸는데 분명 진하고 강렬한 향은 아니지만 나는 그런 풋풋한 라벤더 향을 너무 좋아한다. 그 향은 바삐 걸어가던 내 발걸음을 천천히 가게 만들고 자연스레 뒷짐을 지고 푸른 하늘을 보게 한다. 내게 여유를 만들어준다.
일찍이 로마 시대 사람들은 라벤더 향에 매료되어 집집마다 라벤더를 길렀다고 한다. 그 꽃을 따다가 목욕물과 세탁물에 넣고 향을 돋운 것이다. 또한 라벤더엔 훌륭한 살균 효과가 있다는 걸 깨닫고 약용으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이처럼 라벤더는 우리 인류와 오랜 시간 관계를 맺어왔다. 사실 처음부터 프로방스의 라벤더가 유명하지는 않았다. 로마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라벤더를 조금씩 길렀던 것처럼 프로방스 사람들도 자신과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작은 규모로 농사를 지었을 뿐이다. 그러나 중세 이후 라벤더 오일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라벤더 수요는 프랑스 전국으로 또 유럽 전체로 뻗어나갔다. 몇 년 전부턴 일본과 중국, 우리나라 방송에까지 프로방스 라벤더가 소개되면서 그 유명세는 더욱 커졌다. 이제는 저마자 예쁜 옷을 입고 사진을 찍으려는 아시아 사람들로 넘친다.
라벤더 농사로 여름 한 철에만 먹고사는 농민들은 이런 관광객들이 반가울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나는 시토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세낭크 수도원에서 1주일간 피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세낭크 수도원은 라벤더 밭으로 유명한 장소 중 한 곳인데 그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수사들은 지나친 관광객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수사들 말로는, 관광객들이 수사들이 생활하는 봉쇄 구역에 함부로 들어간다던지 수도원 운영에 필요한 라벤더 밭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밟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주의를 요하는 푯말이 있는데도 말이다.
라벤더 꽃은 대개 6월 말에서 7월 중순까지 펴 있는데 7월 초가 되면 가장 절정을 이룬다. 또 매년 날짜는 다르지만 7월 중순이 막 지날 즈음부터 농민들은 라벤더를 수확하기 시작한다. 나는 매년 이곳에 찾아오는 친구들을 위해 가장 꽃이 예쁘게 펴 있을 때를 알아보고 그곳에 데려간다. 일부러 관광객이 많이 없는 곳을 찾아가고 관광객이 많이 없을 시간에 찾아간다. 개인적으로 나는 해질 무렵에 바라보는 라벤더 밭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노을빛과 라벤더의 보랏빛이 은은하게 섞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이 곳 사람들이 라벤더와 함께 기르는 꽃이 하나 더 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자주 그림을 그렸던 해바라기다. 아쉽게도 라벤더를 보러 온 사람들은 해바라기를 잘 보지 못한다. 두 꽃의 개화 시기가 달라서 꽃 하나밖에 못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 날이 따뜻해서 해바라기가 꽃을 일찍 피우는 때가 있다. 라벤더가 서서히 지는 것과 동시에 해바라기가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그 기간은 딱 1주일 안팎인데 세상에 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싶다. 온통 들판이 보랏빛과 노란빛으로 가득하다.
▶ 직접 촬영한 라벤더 여행 영상 보기 https://youtu.be/_geLqk-sZ9Q
나태주 시인은 '풀꽃'이라는 시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라고 했지만 라벤더가 풀꽃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적용이 안 되는 듯하다. 꽃 하나가 너무 작기 때문에 가까이서 보면 예쁘지 않고 오래 보면 벌들 때문에 고생한다. 라벤더 밭에 찾아가 본 사람들은 이미 알겠지만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멀리서 꽃을 감상만 하고 있어도 벌 떼가 윙- 윙- 거리며 움직이는 소리를 적잖게 들을 수 있다.
처음 내가 프랑스에 와서 라벤더를 보러 간 날도 벌들이 장난 아니게 많았다. 그날에 나는 기분이 상당히 상기되어 있었다. 라벤더 밭만 보이면 뛰어들고 떨어진 꽃을 들어 코에 갖다 대기 일쑤였다. 그때 내 오른팔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벌이 내 팔꿈치에 벌침을 쏜 것이다. 내 생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벌에 쏘여본 순간이었다. 나는 신속히 물로 깨끗하게 씻고 벌침을 뺐지만 독으로 인해 반나절 동안 오른팔이 계속 저릿거렸었다. 그래서 나는 늘 이곳을 찾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라벤더 밭은 '멀리 보아야 예쁘다. 잠깐 보아야 사랑스럽다'라고.
강렬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을 주는 라벤더의 보라색은 원래 귀족을 대표하는 색깔이었다. 보라색 염료를 만들기 위해 수 천 개 이상의 조개가 필요했었고 이내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색깔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서민들에겐 부러움과 미움을 함께 떠올리기 좋은 색깔이었다. 또 우리 사회에 비일비재하게 퍼져있는 말, '보라색을 좋아하면 돌아이다. 정상이 아니다.'라고 수 없이 들어봤을 것이다. 아마도 다른 색깔과 달리 보라색은 일상생활에서 흔하지 않은 색깔이며, 강한 빨간색과 차가운 파란색이 섞여 만들어진 오묘한 색깔에서 독특함을 드러내기보다 불편함을 느꼈었나 보다. 이렇듯 보라색은 오랜 시간 대중적으로 사랑받지 못한 색깔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보라색이 대중으로부터 환영받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위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 하나인 텔레토비에서는 보라돌이라는 캐릭터로 아이들의 큰 사랑을 받았고 최근들어 보라색은 점차적으로 여성들의 화장에도 스며들었다. 더불어 내가 살고 있는 프로방스에서는 자신들을 나타내는 색깔로 으레 보라색을 선택했으며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프로방스 하면 보라색을 떠올린다.
어느 날 나는 라벤더 밭을 잔잔하게 바라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 적이 있다. '보라색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깔이구나' 하고 감탄을 했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나의 특징을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게 할지 고민을 한다. 그러나 너무 튀는 것은 눈살을 찌푸리게 할 뿐이다. 따라서 보라색이야 말로 누구나 자신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색깔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또 여러 색이 섞여서 세련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것처럼 어느 곳에서나 잘 어울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너무 존재감이 없지도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색이라고 쉽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이 라벤더 밖에 없는 프로방스에 찾아오는 이유도 그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아 가기 위해서 일 수도 있다. 그 옛날 로마 사람들이 라벤더를 자신의 몸을 치료하는데 쓴 것처럼 라벤더의 보라색이 일상에서 지치고 다친 우리 마음을 세련되고 아름답게 바꿔 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