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한국과 프랑스와의 관계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프랑스에 도착하기 전엔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2016년에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맞아 파리에서 큰 축제가 열였다는 뉴스를 보고 두 나라의 관계가 오래되었다는 내용 정도만 알고 있었다. 프랑스에 와서도 어학 공부하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느라 더 이상 알아보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사실 국제 정치 역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상 누가 그 관계에 쉽게 관심을 두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어학을 공부할 때 주 프랑스 대한민국 대사가 엑스 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단순히 한국을 소개하는 시간이었지만 많은 프랑스 학생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했었다. 대사는 한국과 프랑스의 관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모습들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의 발표 내용을 듣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한국과 프랑스는 조선 말기 1886년에 조불 수호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외교관계를 시작했지만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관계는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게 대사의 설명이었다. 바로 파리외방전교회 가톨릭 신부들의 한국 입국이 두 나라 관계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종교학을 공부했었고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나로서는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주제를 조금 더 파보기로 했다.
그 관계의 시작
우리나라 가톨릭 교회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신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보통 선교사들이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과 다른 경우다. 그러나 처음에 가톨릭은 종교가 아니었다.조선 말기, 시대 변화의 흐름에 따라 유학자들이 중국에서 새로운 학문과 과학 기술을 국내에 가져오기 시작하면서 가톨릭이 학문으로 들어오게 됐다. 서학을 연구하던 사람들은 이게 단순한 학문이 아닌 종교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고 스스로 교계제도(일종의 교회의 조직)를 스스로 만들기에 이른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누구는 신부, 누구는 수녀, 누구는 회장 등을 정해서 서로 세례를 주고 미사(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가톨릭 교회 교회법과 교리적으로도 너무 어긋나는 행위였다. 그래서 그들은 신부님을 우리나라에 보내달라고 편지를 써서 중국을 통해 교황청으로 보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중심인 서울 명동대성당. 프랑스 신부가 설계했고 그 지하엔 프랑스 선교사들의 유해가 있다.
교황청은 유럽 가톨릭 교회와 이미 중국에 진출해 있는 수도회(예수회나 프란치스코 수도회 등)에 조선으로 선교 나갈 신부를 뽑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어느 곳도 그 응답에 응하지 않았다. 당시 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던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Barthélemy Bruguiére) 신부만이 개인적으로 지원했을 뿐이었다(1829년). 처음에 그가 속해 있었던 파리외방전교회는 그의 요청을 반대했었다. 그러나 브뤼기에르는 수많은 편지를 전교회 파리 본부와 교황청에 보내면서 자신이 꼭 선교를 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교황청은 기다렸다는 듯이 조선을 중국 관할 구역에서 떼어나 새로운 가톨릭 관할 구역을 만들고 조선교구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브뤼기에르 신부를 초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했다(1831년). 하지만 안타깝게도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입국을 코 앞에 두고 병환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1835년).
조선에 처음 입국한 프랑스 신부는 삐에르 모방(Pierre Maubant)이었다(1836년 1월). 그는 조선인 신부 양성을 위해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로 보냈는데 그중 한 명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다. 더불어 내가 살고 있는 프로방스 출신의 앵베르 신부(Laurent Imbert)는 훗날 제2대 조선교구 주교가 되어 최초로 입국한 주교가 되었다(1836년 12월). 당시 조선은 가톨릭 신자들을 무참하게 죽이던 시기였다. 흥선 대원군은 주변 열강 속에 위태한 나라를 살리고자 프랑스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래서 프랑스 주교를 만나 그 문제를 의논하려고 했으나 여러 정치적 이유로 그 만남은 불발되었고 수 만 명의 가톨릭 신자가 죽는 박해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때 순교한 순교자들 중 103명은 1984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서 성인(Saint)으로 선포되었는데 이는 2000년 가톨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많은 인원이 성인으로 선포된 일이었다. 또한 이 예식은 관례적으로 바티칸에서 이뤄져야 했으나 처음으로 바티칸 밖 서울에서 이뤄졌다. 이뿐 만이 아니다. 교황청은 전 세계 가톨릭 교회가 9월 20일에 한국 순교자들을 의무적으로 기억하고 예배(미사)를 드릴 수 있게 조치까지 했다.
한국 103위 순교 성인화. 이중 10명이 프랑스 사람이다.
서로 닮아가는 우리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이 쏘아 올린 한국과 프랑스 관계는 단지 과거에서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6년에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과 주교들 그리고 신부와 신자들은 순례단을 꾸려 한국에 방문했다. 가톨릭 박해 중 가장 큰 박해였던 병인박해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프랑스 선교사들의 후손들도 함께하여 선조들을 끊임없이 기억해주는 한국 가톨릭 교회에 고마움을 전했다. 최근 2019년 9월에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입국한 주교인 앵베르 주교를 기억하는 행사가 내가 살고 있는 프로방스에서 열렸다. 프랑스 곳곳에서 온 프랑스 주교와 신부, 신자들 그리고 한국에서 온 약 60여 명의 신부들과 신자들이 함께 우정을 나눴다. 그동안 프랑스에서 한국 가톨릭을 기억하는 행사를 여러 번 연적은 있었지만 국제적으로 크게 연 행사는 처음이었다.
2019년 9월 남프랑스 마리냔에서 열린 앵베르 주교 순교 180주년 행사
나는 여러 자료를 찾아보고 요약해서 썼지만 그 방대한 내용을 읽으면서 130년 넘게 이어온 두 나라의 관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대한민국에서 프랑스 선교사의 입국을 한국과 프랑스 관계의 시작이라고 인정했을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한 프랑스 신부님이 나에게 이런 얘기를 했었다. "프랑스와 한국은 점점 닮아가는 것 같아. 종교적 이유로 관계가 시작됐지만 지금은 여러 면에서 함께 세계를 이끌고 있잖아. 나도 한국을 닮아가고 있어. 한국 순교자들이 내가 신부 생활하는데 영적으로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데! 이제 난 김치도 먹을 수 있다고!"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