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친구들이 프랑스에 오는 날이면 종종 파리에서 맞이할 때가 있다. 나의 소중한 친구들이 프랑스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나름의 계획을 짜서 데리고 다니는데 내가 꼭 데리고 가는 세 장소가 있다. 프랑스의 시작점인 시떼 섬에 세워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과 몽마르트 언덕에 우뚝 솟아 잇는 사크레 쾨르 대성당 그리고 찬란한 빛이 영롱하게 들어오는 생트 샤펠이다. 누구든 종교에 상관없이 성당이 주는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며 구경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장소의 공통점은 분명 가톨릭 교회의 미사(예배) 장소다. 생트 샤펠을 제외한 나머지 성당에서는 아직도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어떻게 종교적 장소를 통해 프랑스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지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프랑스를 얘기하려면, 프랑스에서 살아가려면, 프랑스를 더 이해하고 싶다면 가톨릭 교회와 라이시떼(laïcité)를 알아야 한다. 프랑스 역사 안에서 이 두 가지는 분명 상극 관계이지만 그렇다고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프랑스는 가톨릭 교회를 1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라의 종교로 삼아왔다. 프로방스 전승에 의하면 남프랑스는 교회의 역사가 더 오래되었으나 분명 프랑스는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가톨릭 교회가 프랑스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였는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위치만 봐도 알 수 있다. 파리 시떼 섬은 프랑스의 기원이 되는 섬이다. 그곳 한가운데에 대성당이 지어져 있고 지금도 성당 앞 광장에 있는 제로 포인트를 기준으로 도시 측량을 한다. 파리뿐만 아니다.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시골, 심지어 산 꼭대기와 절벽까지 사방팔방으로 성당이 세워져 있다. 폴 세잔이 가장 사랑했던 생 빅투와 산 꼭대기엔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이 땅을 깊게 파서 만든 작은 성당도 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종교로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때가 많았다. 성직자들은 상당한 위치의 권력층으로 성장했고 그만큼 많은 재산과 사회적 힘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프랑스혁명 때 큰 타격 대상이 되었다. 큰 도심과 지방의 여러 곳에 세워져 있던 십자가와 성모상 그리고 성인들의 동상이 철거되었고 성당도 습격으로 무너졌다. 또 가톨릭 교회를 로마 교황청에서 단절시키고 프랑스 국가 만의 시스템으로 재정립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 많은 성직자들이 국가에 충성하기를 강요받았고 이를 거부한 수천 명의 성직자들은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라이시떼(laïcité)는 이런 배경으로 1910년에 제정된 프랑스 법이다. 우리나라 말로는 완벽하게 번역을 할 수 없어서 종교 분리법이라고 부르고 있다. 요약하자면 프랑스 내엔 어느 종교도 인정하지 않으며 종교를 사회 정치와 분리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즉 정부는 종교활동에 관한 어떤 재정적 지원을 하지 않고 공공영역에서 종교적 발언이나 행동을 하지 못한다. 또 교회도 정치 발언과 참여를 전혀 하지 못한다. 게다가 교회가 갖고 있던 재산은 정부에 귀속되어 1910년 이전에 지어진 성당과 사제관, 수도원 등 모든 게 정부 소유가 되었다. 1968년에 일어난 5월 혁명은 종교가 더욱 사회와 분리되고 사적인 영역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아는 한국 신부님이 처음 엑상프로방스에 와서 겪은 웃픈 일이 있다. 신부님은 대교구청에 용무를 보기 위해 택시를 타고 나섰다. 아직 동네 지리를 완벽하게 알지 못하기에 택시만큼 완벽하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은 없었던 것이다. 택시는 한참을 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차를 세웠다. 신부님은 자신이 도착한 곳이 당연히 대교구청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곳은 시내 한가운데에 위치한 극장이었다. 신부님은 너무 황당해서 두리번거리다가 극장 간판을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극장 이름이 대교구청 극장(Théâtre de l'Archevêché)이었던 것이다. 원래 그 건물은 가톨릭 교회의 업무를 보던 대교구청(l'Archevêché)이었으나 라이시떼 제정 이후 정부에 귀속되어 극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내가 라이시떼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십자가 목걸이와 묵주 팔찌를 차고 어학당에 간 적이 있었다. 가톨릭 신자로서 한국에서 했던 대로 그대로 착용한 것뿐이었다. 교실과 복도를 지나가는 모든 선생님들은 "십자가 목걸이네?", "예쁘네", "목걸이 어디서 났어?" 등 한 마디씩 하고 지나갔다. 또 학교에서 같이 밥을 먹었던 어떤 프랑스 학생은 "너 성당 열심히 다녀?"라는 질문으로 내 목걸이와 팔찌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었다. 나는 내심 프랑스 사람들이 내 목걸이와 팔찌가 한국산(?)이라서 관심을 가지는 줄 알았다. 프랑스엔 우리나라만큼 가톨릭 매장이 잘 되어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긍정적 관심이 아니었다. 학교는 공공 영역이라서 종교 상징물을 착용하지 못하는데 내가 당당히 착용하고 간 것에 대한 관심이었다. 부정적 의미였던 것이다.
종교란 사회에 긍정적인 존재가 되어야 그 가치가 빛난다. 독불장군으로 자기가 갖고 있는 가르침만이 맞다고 우기거나 대중 앞에서 앞장서기만 한다면 종교와 함께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가톨릭 교회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부정적인 영향도 미친 게 사실이다. 그 결과가 지금 프랑스 사회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도 받고 결혼도 하고 장례도 치루지만 정작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또 프랑스 사회 곳곳에 가톨릭 색채가 강한 축제가 많이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종교적 의미의 축제가 아닌 문화로 여기고 있다. 종교학에서 사람은 종교와 필연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어느 때 사람이든 사후 세계와 미지의 영역에 궁금증을 갖기 마련이고 어떤 형태로든 종교가 발생한다. 그러나 너무 종교적이어도 안되고 너무 사회적이어도 안된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는 종교와 사회가 공존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를 이해하려면 종교를 이해해야 하고 종교를 이해하려면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프랑스 가톨릭 교회를 바라보며 종교란 무엇일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나 자신과 종교의 균형 그리고 나와 사회의 균형. 참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