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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곰 Nov 14. 2019

이런 바게트 인생 같으니

프랑스는 분명 세계 상위권 안에 드는 경제 대국이다. 이를 우리는 선진국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의 민주주의 체제를 포함해서 산업 기술은 세계 여러 나라에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는 고속철도 사업을 시작하면서 프랑스 기업을 선정했고 프랑스 고속열차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지금까지 쓰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나라도 대부분의 영역에서 프랑스를 앞질렀거나 동등한 위치에 서있는 듯하다. 우리나라도 선진국 대열에 당당히 서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겠다는 결심을 할 때 프랑스에서 잘 적응할 거라고 자신했다. 우리나라라는 선진국에서 프랑스라는 선진국으로 장소만 옮길 뿐인데 어떤 어려움이 내 앞을 가로막겠냐는 거였다. 언어와 문화 차이만 이겨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프랑스에 당당히 발을 디뎠다. 하지만 선진국이라도 다 같은 선진국은 아니었다. 각자가 잘할 수 있는 부분에서만 선진국이었던 것이다. 


파리의 거리


노동자의 권리가 우선인 프랑스

프랑스에 처음 도착해서 나를 맞이한 것은 고속 기차였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엑상프로방스로 가야 했기 때문에 직행 기차표를 미리 사놓은 상황이었다. 나는 기존에 유럽 곳곳을 여행하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마치 현지인 인양 자연스레 기차역으로 갔고 익숙한 듯 아무 표정 없이 내 기차표와 전광판에 나오는 기차 시간을 번갈아봤다. 기차가 도착할 시간이 될 무렵, 전광판에는 기차가 연착되었다는 소식이 떴다. 누가 봐도 빨간 글씨로 늦는다는 공지였다. 남프랑스로 가야 할 길이 먼데, 기차가 늦는다는 소식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고속 기차는 1시간이 지나도 2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3시간 반이 지나고 나서야 엑상프로방스행 고속 기차가 도착했다. 나는 오랜 시간을 기차역에서 허비한 것에 너무 화가 나있는 상태였다. 진땀을 흘리고 얼굴을 벌게졌으며 씩씩 거리는 숨소리가 옆 사람까지 들릴 정도였다.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어떤 프랑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도 엑상프로방스에 가는 모양이었다. 이때다 싶어 나는 나의 갖은 불만을 그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갖은 내 불만을 다 들은 그 프랑스인은 간단하게 딱 한 마디 했다. "이건 일상적인 일이야! c'est normal!" 


기차가 연착된 이유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기 때문이란다. 파업은 프랑스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 중에 하나이다. 봄과 가을이 되면 철도청을 포함해서 공항까지 공공 부분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파업을 한다. 마치 날짜를 미리 정하기라도 했는지 같은 날 파업이 일어나지는 않고 서로 피해 가며 파업이 일어난다. 프랑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이유는 크게 몇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로 임금 문제, 두 번째로 근로시간문제, 세 번째로 정부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대부분 프랑스 사람들은 불편함을 충분히 감수한다. 파업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불편함을 드러내면서 화를 내기보단 파업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응원의 한 마디를 건넨다. 파업을 주로 봄과 가을에 하는 이유도 있다. 여름과 겨울은 프랑스에 찾아오는 관광객이 많기 때문에 그들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노동자와 이용자 간의 암묵적인 합의가 지금의 선진 노동 환경을 만들어냈다.



느려도 너무 느린 프랑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사람들은 일을 너무 안 한다. 격한 표현을 쓰자면 일을 열심히 안 해도 프랑스는 먹고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공기업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쉽게 해고를 당할 수 없으니 어느 정도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 지난 5월, 프랑스 국회 하원에서는 공무원들이 주 35시간 근무를 강제로 할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됐다. 이는 에마뉘엘 마크롱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추진하고 있는 공무원 개혁의 일환이었다. 프랑스는 원래부터 주 35시간 근무를 실시하고 있었지만 공무원들은 이 조차도 지키지 않고 근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늦게 출근하고 빨리 퇴근하는 게 프랑스 공무원이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프랑스에서 모든 것을 처음 시작하는 한국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일 처리가 너무 느려요. 그리고 너무 일을 안 해요!" 나는 아직도 프랑스에서 첫 해를 보낼 때 은행 계좌를 열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프랑스 계좌를 만들려면 최소 3주 이상 걸린다는 얘기를 많은 유학생들로부터 익히 들었기 때문에 나도 단단한 마음을 갖고 프랑스 은행에 갔었다. 프랑스는 모든 행정 시스템을 처리하기 위해서 약속 시간(헝데뷰 Rendez-vous)을 필요로 했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과 연락처를 남기고 은행에서 약속 시간을 잡아주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연락은 오지 않았고 다시 은행에 방문해서 똑같은 절차를 여러 번 거쳤었다. 결국 3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자 내 프랑스 친구는 "아무래도 프랑스 은행 직원들이 연말이라 일을 안 하는 것 같다"며 은행 지점을 바꿔보자고 제안했다. 나는 바로 옆 동네에 있는 은행에서 같은 절차로 약속 시간을 신청했고 1주일 만에 은행에서 약속 시간을 받아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여유를 빼면 단팥이 빠진 단팥빵과 같다.


프랑스 사람들이 책을 읽는 이유?

그때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행정 처리가 굉장히 어렵다. 매년 경시청에 가서 체류증을 연장할 때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서류 한 장이라도 잘 못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 게다가 경시청에 가서 행정 처리를 한다고 하더라도 굉장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시간, 서류를 제출하고 확인받기까지의 시간 등 모든 것을 포함하면 최소한 1시간을 기다리는 데 쓰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공공 기관에 갈 때 꼭 챙기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책이다. 이때만큼 책이 잘 읽히는 시간이 없다. 마치 한국에서 출퇴근할 때에 지하철에서 잠깐 책을 읽는 재미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여기서 의문을 하나 가질 수 있다. 기다리는 시간에 스마트 폰으로 인터넷을 하면 되지 않냐는 거다. 하지만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프랑스 통신과 인터넷은 우리나라만큼 좋은 환경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건물 내에선 휴대폰이 안 터진다. 언젠가 파리 지하철을 이용할 때 책을 읽는 빠리지앵들을 많이 봤을 것이다. 대개 한국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역시 프랑스는 지성의 나라야!'라고 감탄할 수 있겠지만 사실 지하철에서도 휴대폰을 사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책을 들고 기다림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처럼 아직까지도 기다림을 즐기지 못하는 나는 늘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에서 오래 살면 내가 부처님이 될 것 같아!"



바게트와 인생

그래도 내가 경험상, 프랑스 사람들이 정확하고 빠르게 처리하는 일이 딱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휴가고 두 번째는 바게트 빵이 나오는 시간이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주말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휴식의 시간이다. 우리나라처럼 일요일 낮에 친구 집에 갑자기 가서 놀자고 하면 십중팔구 싫어한다. 이런 우스개 이야기도 있다. 어떤 미국 사람이 프랑스 기차역에서 해진 옷을 입고 바닥에 앉아 있는 프랑스 사람을 발견했었다. 딱 봐도 구걸을 하는 사람이었다. 딱한 마음을 가진 미국 사람은 거금 100달러를 구걸하는 사람에게 내놓았지만 그는 그 돈을 거절하며 한 마디 했다고 한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쉽니다." 프랑스인이 생각하는 주말의 개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다. 또 프랑스는 법정 휴가 1달을 보장하고 있다. 그래서 매년 7월부터 8월은 프랑스에 프랑스 사람보다 관광객이 더 많다. 관광객을 위한 대형 상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개인 상점들은 문을 닫는다. 심지어 가톨릭 교회의 신부님들까지도 성당 문을 닫고 휴가를 떠난다.


매일 먹어도 맛있는 프랑스 빵

프랑스에서 빵집은 휴가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있다. 휴가 기간에도 빵 집주인들이 서로 번갈아가면서 떠나기 때문에 빵집 문이 항상 열려있다. 프랑스 사람들의 주 먹거리라고 할 수 있는 바게트(Baguette)는 칼 같은 시간에 나온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가 시작되기 직전에 많은 사람들이 빵집에서 신선한 빵을 사기 위해 기다린다. 프랑스 빵은 내가 생각해도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세계 여행을 나름 많이 해봤지만 프랑스만큼 신선하고 겉과 속이 다른 빵을 만나 본 적이 없다. 바게트뿐만 아니라 빵오쇼콜라(Pain au chocolat), 크루아상(Croissant), 깜빠뉴(Pain de campagne), 브리오슈(Brioche) 등 모든 빵이 하나같이 개성 있고 맛이 있다. 여기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빵은 곧 프랑스를 대표하는 먹거리이기에 프랑스 정부에서 빵 하나하나에 만드는 방법을 규제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전통 바게트는 1993년에 선포된 법령에 따라 밀가루, 물, 효모 그리고 소금만 사용해야 한다.


프랑스는 분명 선진국이다. 이 사회에서 불편한 점이 있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다.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인본주의가 크게 퍼져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의 행복과 삶의 만족감만큼 가장 좋은 가치는 없을 것이다. 그 가치를 현실화시키고 지금까지도 계속 노력하는 프랑스 사람들이 굉장히 존경스럽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살아가는 프랑스 인생을 '바게트 인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흔하디 흔한 바게트 빵이지만 정확하면서도 불편함까지 담겨있는 프랑스 만의 철학을 배우고 있다. 또 그걸 즐기는 프랑스 사람들의 여유를 닮아보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외친다. 이런 바게트 인생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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