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가 오랜만에 프랑스 친구를 만났다. 꼭 한 달 만이었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하다가 이윽고 가까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얘기를 이어나갔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별거 없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할 뿐이었다. 어디서 오는 길이었냐느니, 공원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하면 그 공원이 이뻤냐느니, 나도 그 공원에 갔었다느니 등 시시콜콜한 얘기였다. 그렇게 우리는 한 시간 반을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나는 말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사람들과 함께 서로의 생각을 나누면서 모르는 것을 배우고 내가 아는 것은 전달해주는 순간을 즐긴다. 또 분위기가 침울할 땐 내가 나서서 갖은 농담으로 웃음바다를 한바탕 만들어 놓아야 보람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사실 처음부터 말하는 걸 좋아했던 건 아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서기 힘들어했고 만나더라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침묵으로 대화가 끝난 적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국어 선생님은 권유 같은 강요를 나에게 들이밀면서 반 친구들 앞에서 뉴스 원고를 읽은 적이 있다. 나는 무척이나 긴장한 상태로 원고가 쓰인 종이를 들고 있었다. 모든 친구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매우 창피했었다. 그리고 그 원고를 한 줄씩 읽으려고 하는 순간 나는 갑자기 아홉 시 뉴스 앵커의 모습이 떠올랐었다. 아무래도 뉴스 원고이기 때문에 뉴스 앵커처럼 읽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진지한 어투와 함께 또박또박 한 글자씩 발음하면서 원고를 읽었다. 친구들이 막 웃기 시작했고 국어 선생님은 눈물까지 흘리며 내 옆에서 한바탕 웃고 있었다. 나는 애초에 웃기려고 진지한 어투로 읽은 게 아니었지만 나도 사람들을 웃길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아니었다. 지금도 글을 잘 쓰지 못한다. 내 머릿속에 있는 수 만개의 단어를 뒤집어가면서 수없이 글자를 지웠다가 결국 쓰는 게 나의 글이다. 그러나 내가 글 쓰는 걸 좋아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오고 그 소감문을 학교에 제출했는데 우수상을 받은 것이다. 전혀 기대도 안 했던 상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내 글을 심사했던 다른 반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러서 문예부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었다. 자신과 함께 글을 연습해보고 다듬어가면서 여러 문예지에 내보자는 거였다. 선생님과 내가 글을 써갈 때 반드시 지켰던 원칙이 있었다. 어떤 글이든 독자가 쉽고 간결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하고 어려운 단어를 선택하지 말자는 거였다. 이건 지금까지도 내가 글을 쓰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나의 청소년 시절, 말로 사람들을 웃길 수 있고 간결한 글로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발견했다면 대학생 때는 조리 있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원하던 대학에 떨어지고 지방에 홀로 내려가 원하지 않던 대학을 다니고 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 대학에 입학을 하면서 동시에 편입을 준비했는데 대학교 성적만큼은 반드시 전교 석권을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열심히 공부했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시작하기 3주 전부터 도서관에 밤늦게까지 앉아서 공부하고, 모르는 건 무턱대고 교수님을 찾아가서 물어보곤 했다.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았다. 졸업할 때까지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공부하는 모습이 후배들에게까지 소문이 퍼지고 말았다. 시험 기간만 되면 후배들은 도서관에 찾아와서 일명 족집게 강의를 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이해한 범위 내에서 하나씩 알려줬지만 후배들 성적엔 관심이 없었다. 알려달라고 요청이 왔으니 알려줄 뿐이었다. 며칠 뒤 후배들은 각종 빵과 음료수를 나에게 건네주면서 내 덕분에 시험을 잘 봤다고 고마워했다. 황당한 일이었지만 나도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을 만큼의 말 조리가 있구나 싶었다.
프랑스에 와서도 프랑스 사람들을 말로 웃겨보려고 노력했다. 일단 한국과 농담을 이해하는 코드가 달랐다. 우리나라에서 일명 아재 개그라고 불리는 말장난이 여기서는 굉장한 유머로 통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친구랑 시청 앞을 지나가면서 내가 시장님을 프랑스어로 뭐라고 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나에게 '메흐'라고 알려줬고 나는 내 엄마를 네가 왜 찾냐고 받아쳤었다. 친구는 그 자리에서 포복절도를 하고 말았다. 프랑스어에서 메흐는 관사에 따라 시장(르 메흐, Le Maire)이 되기도 하고 엄마(라 메흐, La Mère)가 되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은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가톨릭의 축복 예식을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종이에 축복 예식의 프랑스어, 사크라멍또(Sacramentaux)를 적으면서 그림을 하나 그렸다. 거룩한 후광이 달린 널찍한 코트 그림이었다. 옆에 있던 친구는 내 그림을 단박에 알아차리고 웃기 시작했다. 프랑스어로 사크라(Sacra, Sacrer의 동사 변형)는 축복된이라는 뜻이고 멍또(mentaux)를 살짝 바꿔서 망또(Manteau)로 얘기하면 겨울철에 입는 코트가 된다. 사크라멍또가 거룩한 코트냐고 농담을 던진 것이다. 결국 내 그림은 온 교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교수님 마저도 내 그림을 보고 웃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분명 시답지 않은 말장난인데 말이다.
또 한 번은 자유 주제로 10분 동안 발표를 하는 수업이었다. 나는 한국의 전통 음식을 소개하고자 했다. 각 음식의 어원과 조리 방법, 구체적으로 맛이 어떤지도 설명했다. 하지만 말 하나로 음식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음식을 직접 요리해서 친구들과 함께 맛보는 시간까지 가졌다. 교수님은 내 발표가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쓴 글을 동료 선생님들과 나눠 읽고 싶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부족한 나의 프랑스어를 잘 읽어주는 것만 해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아마도 내 발표가 무척이나 이색적이었나 보다. 내가 음식을 가져와서 발표했다는 소문은 학교에 금방 퍼졌고 강의실에서 만나는 교수님들은 내 글을 읽었는지 한국음식에 관해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더불어 공통된 질문이 하나 있었는데 한국에서 요리 공부했었냐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또 농담스레 얘기했다. 나는 원래 별 세 개를 갖고 있는 그랑 쉐프(Le Grand Chef)라고 말이다.
한 달만에 길에서 우연히 만난 내 프랑스 친구도 이 소문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길에서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멀리서 뛰어왔다고 온 것이다. 괜스레 말을 걸어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정말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하며 글을 나눠 읽는 것도 좋아한다. 분명 그들은 대단한 수다쟁이인 게 틀림없다. 나도 나름 한국에서 수다쟁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프랑스 사람들 앞에선 발톱도 못 내민다. 하지만 분명 나에게 프랑스는 참 잘 맞는 나라다. 한국의 수다쟁이가 프랑스라는 수다쟁이 나라에 오지 않았으면 나는 어떤 수다쟁이로 살고 있을지 상상하기도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