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프랑스어는 어렵다. 분명히 공부할 만큼 공부했다고 생각해도 다음날 되면 까먹는다. 단어를 습득하는 건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모르는 단어를 노트에 적어놓고 가까스로 기억을 하면, 다음 날 그 단어를 쓸 일이 없어서 허탈하다. 새로운 단어가 책 속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올 뿐이다. 먼저 프랑스를 왔다간 어떤 선배가 내게 해 준 말이 있다.
"언어는 계단처럼 늘어."
막상 공부할 때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의 언어 실력을 자꾸 비교하게 된다. 자괴감까지 빠질 때도 있다. 그러나 잠깐 휴식을 갖고 다시 그 자리에 돌아오면 그동안 내가 배웠던 것들이 내 머릿속에 잘 자리 잡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배웠던 언어를 기억해내고 일상생활에서 말할 수 있게 된다. 언어는 절대 언덕배기를 오르듯이 늘지 않는다. 계단처럼 평평하게 가다가 갑자기 오르는 게 언어다. 또 다른 선배는 이런 말을 해주기도 했다.
"언어는 욕할 때 확실히 느는 거야."
프랑스에서 외국인으로 살려면 호주머니에 작은 사전을 반드시 챙기고 다녀야 한다. 가끔 프랑스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무시당할 때가 있다. 아마도 더듬거리며 프랑스어를 하는 내가 우습나 보다. 나는 기분이 나쁘면 나쁘다고 따지고 잘못된 부분은 잘 못됐다고 따져야 한다. 이럴 때 내 사전이 실력 발휘를 한다. 내 손가락은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단어를 찾고 있고 내 머리는 누구보다 빠르게 단어를 습득해서 즉시 입으로 나오게끔 한다. 그리고 평소에 알아두었던 프랑스 욕을 함께 곁들여서 말하면 그보다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확실히 언어는 정말 필요한 단어를 찾아서 바로 활용하면 기억에 오래 남는다.
하루는 기숙사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내가 프랑스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준 무슈(Monsieur)가 저녁식사를 하러 기숙사에 왔었다. 마침 성탄을 기다리는 12월이라서 기숙사 학생들과 성탄 준비를 하러 오셨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준비하려고 자리에 일어서는 순간 무슈는 나를 부르더니 잠시 얘기를 하자며 옆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나에게 프랑스어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있다며 다그치듯이 얘기를 시작했다. 또 어학이 끝날 때까지 한국 사람들과 만나지 말라는 말도 했다. 이뿐 만이 아니었다. 내가 기숙사에서 진행하는 공동체 프로그램에 한 번 빠진 적이 있었는데 왜 자꾸 상습적으로 빠지냐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당부까지 했다. 프랑스에서 제대로 생활하지 않으면 넌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 라는 말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나는 무척이나 화가 났었다. 아무래도 오해를 하고 있는 듯해서 어떤 얘기든 꺼내려고 했지만 무슈는 자기 말만 하고 나가버렸다. 나는 이런 말이 왜 나오게 됐는지부터 나름의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얼마 전 한국에서 온 내 친구를 데리고 시내를 구경시켜준 적이 있는데 그 모습을 기숙사 사감이 본 모양이었다. 결국 뮤슈가 들은 얘기는 모두 기숙사 사감에게서 나왔던 것이다. 나는 바로 기숙사 사감에게 따지고 화낼 수 있는 상황을 열 가지 정도 적어서 그에 맞는 단어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름의 대화를 상상해가며 문장까지 만들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말로 뒤쳐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 날 저녁에 만난 기숙사 사감은 내 얘기를 듣더니 자기변명만 할 뿐이었다. "그런 의도로 얘기한 게 아니었어.", "무슈가 너한테 심하게 얘기할 줄 몰랐네." 심지어 이런 말까지 나에게 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남 얘기하는 걸 너무 좋아하는데 굉장히 부풀려서 많이 얘기해. 너 얘기도 내가 그렇게 얘기했던 거야". 나는 두 시간 동안 기숙사 사감에게 잘 못된 점을 하나하나 예를 들어서 설명을 했고 결국 사과를 받아낼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 했다. "그런데 너 갑자기 프랑스어를 왜 이렇게 잘해?" 나는 마음속으로 '너랑 싸우려고 준비했지, 이놈아!'라고 하면서 유유히 그 방을 빠져나왔다.
나는 아직도 그때 썼던 프랑스어를 잊을 수가 없다. '무시하지 마라', '참견하지 마라', '오해하지 마라', '뒷담화하지마라', '이해력을 좀 넓혀라', '멋대로 판단하지 마라' 등 지금까지도 유용하게 써먹고 있다. 분명히 부정적인 의미가 팍팍 담긴 말이지만 나름 나를 프랑스에서 강하게 만들어주는 말이기도 하다.
학교 도서관은 내가 시험공부를 준비하는 곳이면서 따지거나 화낼 상황이 있을 때도 찾는 곳이다. 조용한 듯 소근거리는 말소리가 가득한 분위기와 수많은 책들 사이에 껴서 새로운 단어를 찾는 희열은 요즘 내가 새롭게 발견한 즐거움이다. 도서관에서 자주 같이 공부하는 프랑스 친구는 이런 내가 열심히 공부하는 줄 안다. 가끔 내 노트에 적힌 부정적 의미로 가득한 단어를 보고 놀라기는 하지만 이내 '따지거나 화낼 일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내 프랑스어 실력이 향상되기를 바라는 바람에서다.
그렇다해도 나는 따지거나 화낼 일이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머릿속에 저장되는 프랑스어는 늘겠지만 그로 인해 생기는 스트레스는 꽤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스트레스 속에 기억하는 프랑스어는 단어 철자만 남는게 아니라 안좋은 기억까지도 강하게 남게한다. 어쩌면 그래서 따지거나 화낼때 언어가 느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언어는 분명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다. 그렇다면 부정적 상황에서 의사소통을 하다가 기억을 쉽게 하기보다는 행복하고 기쁨이 가득한 상태에서 언어를 쉽게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게 가능하다면 나는 프랑스어를 조금 더 사랑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