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만큼 휴가가 많은 나라가 또 어디 있을까. 프랑스는 휴가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여름에, 직장인들이 휴가를 한 달이나 보낼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이 시기를 '그랑 바캉스'(Les grandes vacances)라고 부른다. 그래서 7월과 8월엔 정작 프랑스 사람들이 프랑스에 거의 없다.
학생들도 그에 못지않게 방학이 많다. 9월 중순부터 말 사이에 1학기가 시작되면 새로운 반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서서히 알아갈 때쯤 바로 '뚜썽(la Toussaint) 방학'을 맞이한다. 반드시 11월 1일이 껴있는 10월 말에 1주일간 방학을 가지는데 가톨릭 교회가 매년 11월 1일에 모든 성인(Saint)들을 기념하는 날에서 유래했다. 이 시기에 학생들은 가족들과 조상들이 쉬고 있는 공동묘지에 가서 영원한 안식을 빌어주고 돌아온다.
추운 겨울바람이 프랑스 전역을 휘어감을 때 학생들은 '노엘(Noël) 방학'을 2주에서 3주간 보낸다. 프랑스에서 노엘은 크리스마스를 의미한다. 프랑스는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모든 가족과 친인척이 성당에 가서 크리스마스 미사를 드리고 저녁을 먹는 전통이 있다.
새해가 막 지나가면 1월 초중순에 2학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봄이 올랑 말랑한 2월 중순이 되면 또 방학을 한다. 나라에서 겨울이 가기 전에 스키를 타고 오라고 공식적으로(?) 보내주는 '스키 방학'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1월에 학기를 시작하자마자 스키를 같이 타러 갈 친구들을 찾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낸다.
꽃잎이 만개를 시작 하고 어느덧 따뜻한 봄바람이 불 즈음이면 가톨릭 교회는 부활절을 맞이한다. 역시나 프랑스가 가톨릭 국가였기 때문에 학생들은 3월 중순에서 4월 초중순 부활절(부활절 날짜는 매년 변경된다)에 맞춰 '부활절 방학'을 2주간 보낸다.
그밖에도 프랑스 국가공휴일인 5월 1일 노동절, 5월 8일 2차 세계대전 종전기념일, 부활절 이후 40일째가 되는 예수 승천일, 7월 14일 혁명 기념일, 8월 15일 성모승천일, 11월 11일 1차 세계대전 휴전기념일 그리고 6월 말부터 시작하는 여름 방학까지 포함하면 프랑스 학생들은 1년 중 절반을 휴가로 보내는 셈이다.
나는 방학 때마다 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프랑스 주변에 있는 여러 나라들을 여행한다.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스위스 등 10만 원 안쪽으로 비행기 왕복 티켓을 살 수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을 가려면 무조건 비행기를 타야 하고 환전하랴, 비자 발급하랴, 휴대폰 로밍하랴 여러 가지 준비사항이 많지만 유럽은 그렇지 않다. 유럽 연합 내에서 모든 비자가 면제되고 화폐도 대부분 통일되어 있고 휴대폰도 어느 나라에서든지 사용할 수 있다. 그저 나는 옆 동네에 놀러 가는 기분으로 딱 가방 하나만 매고 가볍게 유럽을 돌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방학을 마치고 오면 바로 그다음 방학을 위해 비행기표를 찾아보는데 그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지 모른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내 가족들과 친구들은 나를 염려스럽게 쳐다본 적도 있었다. 공부는 하지 않고 맨날 놀러 다니는 것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랑 연락이 될 때마다 런던에 있고, 또 마드리드에 있고, 파리에 있고, 제네바에 있고, 로마에 있으니 분명 홍길동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을 나는 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프랑스엔 한 달 반마다 방학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하느라 바빴다.
한국에서 방학과 휴가의 의미는 단순히 쉬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복잡하고 어지러운 사회를 떠나는 의미가 강하다. 즉 내가 있는 자리에서 휴가지로 도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에게 휴가의 의미는 자기가 맡은 책임을 끝까지 해내고만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현실이 싫어서, 지금 이 순간이 힘들어서 떠나는 게 아니라 내가 있는 자리를 더 견고히 하기 위해 떠난다. 그래서 나는 이런 프랑스 사회를 '책임감이 있는 자유로움'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도 여타 다른 직장인들과 별 다를게 없이 한국에서 초췌한 직장 생활을 했다. 돈을 벌기에 바빴고 인맥 관리를 하느라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그런데 이제 '나'라는 한국인도 책임감 있는 자유로움을 즐기고 있다. 휴가 때마다 나가는 여행은, 프랑스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대학교에서 수업 듣느라 고생했고 또 프랑스라는 새로운 환경을 책임감 있게 잘 적응한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더불어 책임감 있는 자유는 늘 휴가만 기다리지 않고 휴가가 끝나고 다시 돌아갈 일상도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 비가 온 뒤 땅이 굳는 것처럼, 내가 살짝 비운 사이에 여러 지식들이 내 몸 어딘가에서 잘 자리 잡는 것 같다. 스치듯 지나간 프랑스어 단어가 번쩍 생각나고 하나도 들리지 않았던 수업 내용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한다. 또 어느새 프랑스의 독한 치즈는 달콤하고 고소한 맛으로 변신해서 내 입을 즐겁게 한다. 과연 엑상프로방스 출신의 작가, 에밀 졸라는 한 말은 사실이었다. "여행만큼 지성을 자라나게 하는 것은 없다. Rien ne développe l'intelligence comme les voyages".
아마도 프랑스 국민들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성장하며 살아갈 게 뻔하다. 모든 시간을 열심히 사는 삶, 설렘이 가득한 삶. 바로 이것이 프랑스에 휴가가 많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