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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곰 Nov 05. 2019

또 먹어? : 주말의 긴 식사 시간

프랑스 식 식사

프랑스 식사 시간이 길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밥을 느릿하게 먹거나 음식이 천천히 나올 때 우리는 늘 '이건 프랑스 스타일이야'라고 농담을 하니 말이다. 옛날에 어떤 개그 프로그램에선 에펠탑 사진을 가져다 놓고 아주 천천히 과자를 집거나 아주 천천히 콜라캔을 따며 프랑스의 식사 시간을 풍자하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프랑스 사람들은 밥을 천천히 먹을까? 정말로 밥 먹는 시간이 길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위 Oui', 그렇다. 정말 길다.


하지만 매일 긴 시간을 할애해서 밥을 먹지 않는다. 먼저 아침 식사엔 바게뜨랑 크루아상, 시리얼, 요거트 등으로 간단히 먹는다. 그리고 점심과 저녁 식사로는 고기나 각종 채소, 가끔은 생선요리도 먹는데, 시간이 1시간을 넘질 않는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1시간도 꽤 긴 시간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린 후다닥 밥 먹고 "얼른 가자" 하면 바로 일어나는 게 일상다반사이지 않는가. 실제로 이런 문화 차이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식당을 차리면 손님 예약을 받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보통의 프랑스 식당에서는 손님 예약을 1시간에서 2시간 단위로 받는데 한국 식당에서는 분 단위로 예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막 식사하고 맛을 느끼려는 프랑스인 손님들에게 "다음 예약이 있으니 나가주십시오"라고 하니 얼마나 불쾌했겠는가.


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의 긴- 식사 시간은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했을 때다. 식사 초대는 보통 일요일 점심에 이뤄지는데 프랑스 사람들에게 일요일은 평일에 열심히 일한 뒤 전히 자유롭게  수 있는 날이다. 또 프랑스가 가톨릭 국가였던 영향으로 일요일은 성당에서 주일미사를 참석하는 날이다. 그래서 식사 초대는 주일미사가 끝난 직후 점심에 이뤄진다.



6시간의 식사

나도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성당에서 만난 프랑스 가정으로부터 식사 초대를 받는다. 공부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이다. 가끔은 집주인이 홀로 외국에서 지내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동네 주민들을 잔뜩 초대해서 나를 소개해주기도 한다. 그렇게 알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또 그 사람들이 나를 또 다른 식사에 초대해준다. 프랑스 나름의 정을 나누는 문화인 셈이다.


나는 아직도 첫 식사 초대를 잊을 수가 없다. 몇 년 전 일이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굉장한 식사였기에 선명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그때 내 친구 베르나르는 나와 여러 친구들을 오후 1시에 초대했다. 나는 가장 깔끔한 옷을 입고 설레는 마음으로 좋은 와인까지 하나 사서 1시에 맞춰 도착했었다. 그런데 그 집에 도착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짧은 내 목을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마당엔 내 그림자만 보였다. 내가 첫 번째로 도착한 손님이었다. 나를 발견한 베르나르는 헐래 벌떡 뛰쳐나와서 날 맞이해줬지만 그도 적잖이 당황했던 모양이었다. 베르나르는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왜 이렇게 일찍 왔냐고 내게 물었다. 일찍? 일찍이라고? 순간 내가 약속 시간을 잘 못 알고 있었는 줄 알았다. 그는 나에게, 보통 사람들이 약속 시간을 잘 안 지키기 때문에 1시 이후에 서서히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식사가 준비된 프랑스 식탁

베르나르의 부인인 자끌린은 허겁지겁 요리하던 음식을 마무리하고 정원에 마련된 파라솔 밑 동그란 탁자에 식전 음식(Aperatif)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식전 음식은 모든 사람들이 도착할 때까지 가볍게 집어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식전 음식으로 나온 음식은 이랬다. 올리브 잼(Tapenade)이 발린 바게뜨, 독일식 과자, 감자칩처럼 우리가 흔히 부르는 핑거 푸드였다. 식전 주도 있었는데 샴페인과 꼬냑이 주류를 이뤘다. 부드럽지만 도수가 강한 술이었다. 여기에 프로방스 만의 특별한 식전 주가 있는데 바로 파스티스(Pastis)였다. 이 술은 원액에 물과 얼음을 타서 마시는 건데 내가 마셔본 파스티스 맛을 주관적으로 표현하자면, 김 빠진 사이다에 단맛까지 없어지고 입 안은 텁텁한 보드카 같았다. 


한 시간이 지나자 모든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베르나르가 한 명씩 식사 자리로 안내해줬다. 그리고 각자 와인을 한 잔씩 따르고 건배를 했다. 그 사이에 자끌린은 미리 준비한 샐러드를 가져와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잘게 자른 상추 위에 올리브 열매와 토마토가 얹혀 있는 샐러드였다. 그녀는 식탁 위에 있는 올리브유 병을 가리키며 집 마당에서 직접 기른 올리브 나무로 짠 기름이라고 자랑했다. 나는 바로 그 올리브유 병을 집어서 내 샐러드 접시에 쫘악 뿌렸는데, 그 향기가 내 코를 찔렀고 입맛을 돋게 만들었다.


샐러드를 다 먹은 다음 수프가 나왔다. 프로방스에서만 별미로 먹을 수 있는 피스토(Pistou) 수프였다. 피스토는 지중해 연안에서 자란 각종 야채와 콩을 푹 고아서 피스토 소스(바질과 올리브유를 섞은 소스)를 얹은 수프다. 남프랑스 음식은 파리를 포함한 북프랑스와 다르게 채소와 올리브 음식을 많이 먹는다. 풍부한 일조량과 바람 그리고 비옥한 땅 때문에 다양한 작물이 잘 자라기 때문이다. 나는 기대감을 가지고 피스토의 첫 술을 내 입에 넣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너무 한국 사람 입맛에 맞는 맛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시원하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순간이었다.


프로방스의 별미 피스토(Pistou) 수프

그 사이에 베르나르는 정원에서 열심히 소고기와 소시지를 굽고 있었다. 소고기는 남프랑스 꺄마그(Camargue)에서 사 온 것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횡성 한우 같은 것이다. 나는 열심히 칼질을 하며 풍부한 육즙과 부드러운 살점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때 자끌린이 피식 웃으며 나를 불렀다. 특별히 내가 온다고 소고기를 고추장에 재워서 준비를 해놓았던 것이다. 도대체 고추장은 어디서 구했으며, 분명 고추장에 재웠는데 어딘가 유럽의 맛이 났던 게 신기했지만 그녀의 세심한 배려에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어느덧 5시가 되었다. 안 나오던 배(?)가 통통하게 나올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양을 먹었다. 나는 한국식 표현으로 "너무 많이 먹어서 돼지가 될 것 같습니다. Je serai comme un cochon car j'ai beaucoup mangé."라고 말했더니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껄껄 웃었다. 베르나르는 프랑스엔 이런 표현이 없다면서 꽤 귀여운 말이었다고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이제 슬슬 집에 갈 것 같았지만, 디저트로 각종 치즈와 케이크 그리고 쿠키가 나왔다. 특별히 쿠키는 자끌린이 아침에 직접 구운 초콜릿 케이크라고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초코가 들어간 음식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 케이크만큼은 적당히 달고 느끼하지도 않아서 두 조각이나 먹고 말았다. 디저트까지 먹었으니 이젠 진짜 집에 갈 것 같았다. 그런데 아직도 또 남아있었다. 바로 식후주였다. 내가 "또 먹어요?"라고 얘기하자 베르나르는 "이게 진짜 마지막이야"라고 말하며 자신이 직접 담근 체리주를 가지고 왔다. 그는 초대한 손님들에게 한 잔씩 다 따라주면서 오늘 식사에 함께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정말로 식사 시간이 끝났다. 저녁 7시었다. 술로 시작해서 술을 마시고 술로 마친 장장 6시간의 식사 시간이었다. 



프랑스에서 식사의 의미

내가 지금까지 프랑스에서의 식사 시간을 겪어보니 프랑스 사회에서 식사 시간을 크게 두 가지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음식', 두 번째는 '친교'다.  


프랑스는 굉장히 넓은 땅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보다 다섯 배 이상 넓다. 그래서 지역마다 각기 다른 기후가 존재하는데 그에 따른 식재료도 다양하다. 노르망디 지방의 식초, 보르도 지방의 와인, 디종 지방의 머스타스 소스, 알자스 지방의 치즈, 꺄마그 지방의 쌀과 소고기 등이다. 또 지역색에 맞는 여러 음식도 발전되어왔다. 브르타뉴 지방의 크레페, 부르고뉴 지방의 뵈프 부르기뇽, 엑상프로방스의 라따뚜이, 마르세유의 부야베스, 알프스 지방의 라끌레트 등이 있다. 재미있는 건 모든 식재료와 음식 이름 앞에 지역 이름이 붙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프랑스 사람들에게 땅(지역)은 살아있는 땅이기 때문이다. 그 신성한 땅에서 식재료가 자라고 길러지며 '음식'으로 탄생한다. 


프랑스 오리고기 스테이크도 별미다.

그래서 식사에 초대된 사람들은 식탁 위의 살아 있는 음식을 음미하면서 먹는다. 더불어 땅이 준 생명의 음식을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과 나눠먹는다는 점에서 하나의 유대감을 느끼고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연다.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으며 '친교(La fraternité)'를 쌓아간다. 사실 개인주의화되어있는 프랑스 사회에서 마음을 연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식사 자리는 이미 마음을 서로 나누고 있는 지인이나, 마음을 열고 싶은 가까운 이웃 혹은 귀한 손님을 초대한다. 손님이 오면 대부분 외식을 하는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나는 베르나르의 첫 식사 초대 이후로도 여러 프랑스 사람들과 식사 시간을 가지고 있다. 분명 첫 만남을 어색해하는 내 자신이지만, 식탁 위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최대한 많은 얘기를 하려고 노력한다. 한 손엔 프랑스어 사전 앱을 켜놓고 부족한 프랑스어로 의사소통을 할 때도 있다. 심지어 소위 '아재 개그'라고 불리는 농담도 불어로 바꿔서 해보기도 한다. 문화가 달라서 그런지 한국의 아재 개그가 여기서는 무척이나 잘 통한다. 최근에 나를 식사 자리에 초대해준 툴루즈(Toulouse) 출신의 한 프랑스 사람은, 한국에 무척이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최대한 아는 범위 안에서 잘 대답해주려고 노력했다. 식사를 마치면서 그가 나에게 한 말이 꽤 인상적이었다. "오늘 우리가 나눈 대화를 잊지 못할 거야. 나는 아직 한국을 가보지 못했지만 이미 한국을 다녀온 것 같아. 그리고 너는 내가 해준 툴루즈 음식을 먹으면서 툴루즈를 이미 다녀온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어?" 그래서 나는 한국식 농담으로 대답했다. "맞아요! 우리의 식사 자리는 부루마블 보드게임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지금 나에게 프랑스 식사 시간은 길지 않게 느껴진다. 3시간이면 짧고 6시간이면 적당하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또 어떤 음식을 먹을지 설렘이 가득하다. 그런데 6시간 이상은 곤란하다. 부루마블 게임도 6시간은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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