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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고찰

by grey dopamine

겨울을 좋아합니다.

겨울의 모든 면을 좋아할수는 없겠지만 사계절 중 그래도 좋아하는 계절을 고른다면 역시나 겨울입니다.


겨울은 계절의 냄새가 진합니다. 지하철에 내려 집으로 걸어가면서 숨을 깊게 들이 쉬곤 하는데 오직 겨울의 냄새만이 들숨에 섞여 폐까지 닿습니다. 냄새는 폐로 맡는 것이 아니라지만, 겨울의 냄새 만큼은 정확하게 폐까지 닿습니다. 폐포 하나하나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이것을 겨울에만 활성화되는 일곱 번째 감각이라고 부르며 혼자 킬킬 웃습니다.


서울의 겨울은 차갑습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은 근본적으로는 온기의 문제입니다. 온기가 절실한 계절입니다. 손에 쥔 것이 없는 나는 늘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녔습니다. 주머니 속에 감춰둔 한줌의 온기를 나 혼자서 꼭 쥔 채로 그 누구에게도 꺼내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잘것없는 손을 펼쳐보였다가 비웃음이라도 사면 곤란하니까요. 내 손은 마른 겨울 나뭇가지처럼 앙상했습니다.


"제발 그 주머니에서 손 좀 빼."


푸념인지 잔소리인지 부탁인지 모를 말을 내게 하던 당신이 있었습니다. 주머니에 감춰둔 손을 머쓱하게 빼면 차가운 공기가 득달같이 달려와 온기를 앗아갑니다. 당신은 얼른 내 손을 잡습니다. 맞닿은 손바닥 사이의 온기는 겨울바람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듯 오래도록 남아있습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아도 따뜻할 수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처음 배웠습니다. 겨울 산책을 좋아하는 내가 꽁꽁 언 얼굴로 당신을 찾아가면 얼른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 나에게 둘러주었고, 그러면 나는 얼른 내 귀마개를 벗어 당신께 씌워주었습니다. 주머니엔 늘 두 개의 핫팩이 들어있던 날들. 춥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가장 따뜻했던 계절이었습니다.


지금은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꽁꽁 언 손으로 스마트폰을 보며 길을 걷습니다. 같은 공간 속 관계없는 사람들과 한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허공을 바라보며 시간을 죽입니다. 나란히 걷는다는 것은 뭘까요. 상대의 걸음에 내 걸음을 맞춘다는 것은 얼만큼의 사랑일까요. 당신이 곁에 없고나서야 사랑에 대해 생각합니다. 손에 무언가 쥐고 있어도 여전히 외로운 사람들. 타인과 나 사이에 겉옷의 두께, 딱 그만큼의 공간이 무한히 존재합니다. 아무리 가까워져도 살끼리 부딪힐 수는 없습니다. 사랑을 옷 속에 감추어 봅니다. 미움도 함께 감춥니다. 찬 공기를 들이마시고 더운 숨을 내쉽니다. 들숨에 사랑을, 날숨에 미움을. 창문이 뿌옇게 흐려집니다.


겨울은 쉽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도 쉽고, 이별하기도 쉽고, 냉소하고 포기하기도 쉽습니다. 조금만 따뜻해지면 그것이 사랑인줄 알고, 조금만 차가워지면 이별하고 싶어집니다. 진짜로 사랑했던 것들과 거리를 둡니다. 그러고는 쉽게 비웃고 땅바닥에 처박고 스스로 짓밟습니다. 나의 것이었던 적 없는 것처럼. 이미 지나간 사랑이 길가의 눈과 섞여 무참히 짓뭉개집니다. 잿빛 오물이 된 그것을 다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것이 모두 녹아 땅에 스미고 꽃이 되어 피는 계절이 오면 다시 그 모든 것을 그리워하고 후회하며 살겠지요. 후회는 아름다운가요. 사랑보다 아름다운가요. 난 잘 모르겠습니다.


겨울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 추위와 고독과 외로움과 사랑과 당신 그 중에 아무것도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밤이 깁니다. 또 눈이 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부디 따뜻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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