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병세는 계절을 무디게 만들었다.
겨울이었고, 봄이었고, 여름이기도 했지만
나는 아무 계절도 살지 않았다.
이제는 세상의 모든 온도가 한겨울의 얼음장처럼 단단히 굳어 보였다.
중대 앞마당의 나무들은 가지 끝마다 한 조각의 고요를 매달고 있었다.
그 작은 떨림을 언뜻 알아채지 못한 채, 나는 기계처럼 똑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군화를 신고 구보를 하고, 총을 분해했다 조립했다 하는 동안에도 마음속 균열은 서서히 넓어져 갔다.
부피 없는 상실감이 내 안팎을 채웠다.
어느 날, 손안에 들어온 작은 화면이 내 세계를 비추었다.
그것은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보는 포커 테이블이었다.
칩의 무게, 패를 쥔 손가락의 떨림, 상대의 눈빛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심장이 다시 고동쳤다.
논리와 확률이 교차하는 그 공간은,
마치 잃어버린 숨결을 되찾는 의식 같았다.
침상 위에 등을 기대고 앉을 때면,
나는 노트에 숫자를 적으며 상상의 테이블을 떠올렸다.
명확한 규칙이 주는 안정감은, 막사 벽에 갇힌 일상의 끝에 유일한 탈출구였다.
침묵이 금기인 곳에서 그 게임만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칩을 밀어 넣고, 판을 접을 때마다 내 안의 감각이 일렁였다.
제대 후,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도망이 아니었다.
어딘가로 가야 한다면,
적어도 내가 택한 방향이면 좋겠다는 단순한 의지였다.
눈발이 가늘게 내려앉은 플랫폼에서,
나는 비로소 내 발걸음의 무게를 느꼈다.
가리봉동의 허름한 골목 안, 모텔을 개조한 방 하나를 얻었다.
벽지에서는 고요한 숨소리만이 흘렀다.
침묵이 내려앉은 방에선 나와 그림자만이 서로를 응시했다.
딜링 연습을 이어간 뒤 새벽녘엔 리플레이 화면을 보며 판단의 오류를 점검했다.
그 시절 내게 포커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다.
내가 세상에 내미는 작은 선언이었다.
성공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최소한 ‘끝까지 해보겠다’는 의지였다.
그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지 않도록, 나는 매 순간 선택에 책임을 지려 애썼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수 있다는 사실.
그건
오래 잊고 있던 생의 감각이었다.
카지노 딜러를 해서 모은 돈으로 생애 첫 대회에 참가했을 때,
눈밭처럼 차가운 현실에 부딪혔다.
경험 한 번이 내게 준 것은 만족이 아닌 끝없는 의문이었다.
어디까지가 실력이고,
어디서부터가 운일까.
그 질문을 품을수록
내 안의 소음은 가라앉았다.
내가 배운 건
확신 없이도 걷는 법.
결과가 아닌
결정 그 자체에 집중하는 태도.
삶처럼,
그 게임도 정답이 없었다.
모든 판단은
결국 나에게 돌아왔고,
나는 점차
그 책임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이윽고, 마음속에는 ‘이루고 싶은 미래’라는 문장이 선명히 떠올랐다.
포커 플레이어.
겨울과 봄, 사계절의 경계가 무뎌진 시간 속에서
나는 비로소 첫 도약을 준비했다.
결박된 군복을 벗어던지고,
확신 없던 발걸음을 조심스레 내디뎠다.
깊은 밤을 가르고 피어오르는 한 줄기 불씨처럼,
내 삶에도 처음으로 부풀어 오르는 희망이 자리했다.
함박눈이 흩날리던 그날 밤,
도시는 여전했지만 내 안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스러진 기억 위에 스며든 새로운 감각.
그 감각은 아직 완전한 언어가 아니었지만,
내게는 충분히 뜨겁고 단단했다.
눈발이 사라진 자리, 나는 첫 도약의 발자국을 남겼다.
권태와 상실의 시간을 지나,
이제는 비로소 스스로가 빚어낸 서사를 써 내려가리라 다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