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3장:천천히 기울던 시간

by Grey

포커를 향한 열망은
어디선가 미세하게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지하의 어딘가.
공기는 오래된 이야기처럼 눅눅했고,
웃음소리 하나도
금세 벽에 눌려 가라앉았다.

그곳에서
작은 토너먼트가 열렸고,
몇 번의 승리가
천천히, 그러나 이어졌다.



한 판, 또 한 판.
칩이 쌓일수록 감정은 흐려졌고,
그 감정의 부재가
이상하게도
내가 옳다는 확신처럼 느껴졌다.



그 후, 나는
무대를 조금씩 넓혀갔다.

연습과 실전이 어긋나지 않는 날에는
결과가 서서히 드러났다.




스크린에 이름이 떠올랐고,
대회의 끝에서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기억은 흐릿했지만,
그 악수의 감촉만은
아직도 손끝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불과 몇 달 전,
참가비를 모으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내가
이제는 전업 플레이어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서 있었다.



숫자보다 먼저,
무언가 살아 있는 것이 내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망, 자부심,
그리고 무기력의 반대편에서 움튼 생의 에너지.
그것은 처음으로
현실이라는 벽을 밀어낸 끝에서
나 자신에게 도달한
아주 작고 선명한 장면이었다.



변화는 통장보다
생활의 공기에서 먼저 느껴졌다.


헤어졌던 연인과 다시 마주했고,
새로운 동네에 방을 얻었다.
내 이름으로 된 차가 생겼고,
식탁 위엔 익숙하지 않은 평온이 놓였다.




작은 기쁨은
곧 확신이 되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삶 전체를 서서히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그 시절의 나는
'이루었다'는 말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시간은 더 이상
내 삶의 주인이 아니었고,
나는
원할 때 자고,
떠나고 싶을 땐 떠날 수 있었다.

가끔은 연인과 전국을 돌며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렀고,
누리고 싶던 것들을
그 자리에서 누렸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내 삶에서
가장 ‘풍요로운 순간’이었다.

자유, 사랑, 시간.
그 모든 것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나는
무언가를 이룬 사람처럼 살고 있었고,
그 환상은 놀랄 만큼
정교하고도 그럴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건 환상이었다.
성장의 얼굴을 한 착각.




소득이 늘자
소비도 자연스레 늘었다.

가방, 향수, 명품, 여행.
그것들은 필요가 아니라,
형태였다.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무언의 연출이었다.

아침마다 지하철역 앞을 지나며
정장을 입은 사람들을 보면
나는 속으로 웃었다.

왜 저렇게 살아야 하지.
그렇게 묻던 나는
다른 방식으로,
같은 것을 흉내 내고 있었다.



겸손은
언제부터인가 자취를 감췄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내 목소리였다.

나는 모든 걸 아는 듯 말했고,
모든 걸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자만은
천천히 퍼지는 투명한 독이었다.

빛은 더 강해졌지만,
그 빛이 닿지 않는 곳은
점점 더 늘어났다.


겉은 화려해졌지만,
속은 텅 빈 껍질이었다.



수입은 일정했고,
통장엔 숫자가 있었지만
쌓인다는 감각은 없었다.

돈은 흘렀고,
나는 그 흐름 위에
떠밀려 다니는 사람처럼
어느 방향으로도
발을 딛지 못했다.



테이블의 금액은 커졌다.
몇 백에서 천만 원을 넘는 판.
실력이라 믿었지만,
믿음은 점점
중심을 잃고 있었다.

밤이면
잠은 얕았고,
눈을 감아도 손끝엔
미처 끝나지 않은 게임의 감각이 남아 있었다.

감정은
테이블 밖으로 흘러나왔고,
그 흐름을 붙잡겠다는 말은
점점 입에만 머물렀다.

나는,
알아채지 못할 만큼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나는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만든 환상의 꼭대기에
올라선 채
소리 없이,
그러나 분명히
무너지고 있었다.


빛은 있었지만,
단단하지 않았다.
그것을 깨닫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