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의 끝자락이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가 나란히 이어지는 계절이었지만,
방 안은 낮게 식은 물처럼 고요했다.
차가운 바닥 위,
굳은 공기가 낮은 곳에 고여 있었다.
머리맡엔 구겨진 흰 봉투 하나,
그 옆에 반쯤 비워진 물병이 있었다.
하루 대부분을 이불 속에서 지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도,
잊으려는 것도 아니었다.
눈을 떴을 때, 잠에서 깼는지
혹은 다른 세계에서 돌아온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눈꺼풀이 열렸다는 사실만이
그날의 유일한 현실이었다.
몸은 점점 굳어갔고,
머릿속은 차가운 진공처럼 텅 비어 있었다.
입 안의 맛은 사라졌고,
공기의 감촉은 피부를 스쳐가지 않았다.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사라질 때,
인간은 어디쯤에 있는걸까.
그건 삶의 반대편이라기보다,
삶과 죽음 어느 쪽에도 닿지 않는
미지의 정적이었다.
나는 오래 그곳에 머물렀다.
시간은 굽이 없이 지나갔고,
계절은 창밖에서만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습관처럼 켠 화면 속에서
낯선 장면 하나가
천천히 떠올랐다.
검은 바다 위,
수면을 따라 흔들리는 빛.
그 위를 잇는 거대한 다리,
그리고 그 너머,
밤하늘이 찢어지듯 벌어지며
불꽃들이 흩어졌다.
푸른 것,
붉은 것,
하얀 것.
불빛은 차례로 피어올랐고,
먼 곳에서는 환성이 들려왔다.
그곳이 호주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같은 하늘 아래 놓여 있지만
이곳과는 전혀 다른 계절, 다른 온도.
마닐라의 방은 눅눅했고,
이불은 무거웠으며,
축축한 벽지처럼
현실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나 화면 속 풍경은
너무 멀었고,
너무 찬란했다.
나는 숨조차 멈춘 채
한동안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이름 모를 감정 하나가
느리게
가슴 아래로 스며들었다.
희망이라 부르기엔 어색했고,
남의 꿈을 몰래 들여다보는 듯한
묘한 떨림.
입 밖으로 꺼내기엔
너무 연약하고 여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작은,
조금은 흐릿한 문장 하나가
속에서 저절로 떠올랐다.
“이대로는 안 돼.”
누가 일러준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향한 말도 아니었다.
그 말은
생각보다 앞서 있었고,
심지어 나보다 앞서 있었다.
마치 바닥을 짚고 튕겨 오르는
작은 반사처럼,
어디론가 향하는 기척이었다.
몸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문장 하나가
무언가를 천천히 기울이기 시작했다.
바꿔야 했다.
이 방을,
이 도시를,
이 몸을.
이미 충분히 무너졌고,
그로 인해
더는 무너질 곳조차 없다는 걸
가만히 알아차렸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올라갈 일만
남은 것 아닐까.
준비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저 멀리,
호주로 향한다면
그 불빛을 다시
눈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느다랗게 떠올랐다.
사는 법도,
버티는 법도
모두 잊은 채였지만,
다시 시작해보겠다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은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고,
나조차 믿지 못했지만
그날 밤,
시드니의 불꽃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빛으로만,
나에게 다시 살아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