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그림자는 어느새 뒤로 물러나 있었다.
창밖 풍경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자리에 멈춰 있었고,
파도는 매번 비슷한 높이로 밀려와
야자수 그림자 곁에 얌전히 포개졌다.
사람도, 차도, 약속도 더는 바쁘게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은 소리 없이 방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은근히,
이미 공기처럼 머물고 있었다.
나는 분주함을 벗어놓은 들판 위에 혼자 서 있었다.
해야 할 일 없는 오후는 낯설었고,
바람이 스쳐가도록 그대로 두는 일은
어쩐지 어색했다.
그제야 텅 빈 마음이 제 그림자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동안 웅크리고 있던 감정들이
햇살 아래 젖은 빨랫감처럼 천천히 늘어졌다.
사람들과의 거리는 여전히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말은 겉돌았고, 웃음은 가볍게 흩어졌다.
그럴 때면, 오래된 책 등을 하나씩 손에 쥐었다.
책장은 조용히 넘어갔고,
문장들은 낯선 이의 따뜻한 뒷모습처럼
서서히 마음 안으로 들어왔다.
어딘가 어울리지 못했던 감정들이
활자 속에서 제자리를 찾는 순간들이 있었다.
바람이 머물지 않는 날의 창문처럼,
내 안의 외로움도 차분히 내려앉았다.
사람은 결국 누구 곁에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책이 먼저 가르쳐주었다.
주변의 환경은 나를 무너지게도,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삶의 거울을 골랐고,
결국 책을 스승이자 친구로 삼았다.
한때는 빠르게 달려야만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자리.
하지만 그것은 멈춘 곳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달리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고 믿던 시간들은,
오히려 나를 멀어지게 하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
꼭 무언가를 이루는 순간에만 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기억은 바래고,
이름표 같던 성적표와 진학,
그리고 어른이 되어 손에 쥐게 된 돈조차
쥔 순간 식어버렸다.
곧 더 많은 무언가를 요구하는,
끝나지 않는 갈증만이 남았다.
목표가 커질수록
그 끝에 닿기 전까지의 시간은
불안과 초조로 채워졌다.
나는 그 안에서 스스로를 끝없이 유예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멈추기로 했다.
가야 할 곳을 모른 채 뛰는 대신,
지금 이 자리의 공기부터 들이마시기로.
그리고 질문을 바꾸었다.
어디쯤 가야 행복에 닿는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내게 무엇을 남기고 있는지.
그 물음 앞에서,
나는 더 이상 갈증을 세지 않기로 했다.
대신,
눈앞의 것들을 세기 시작했다.
크게 나쁘지 않은 일터.
하루의 끝을 감싸는 온화한 날씨.
그리고 아주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는 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손으로 잡히는 무엇은 아니었지만,
가만히 손을 내밀면
조금 따뜻한 온기로 돌아왔다.
행복은, 그리움도 욕망도 모두 가라앉은 자리에서
문득 피어오르는 작은 숨결이었다.
비워진 마음 안에서
소리 없이 피어나는 감각.
빛나지 않았지만,
그 감각은 분명 살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