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늦게 피는 꽃은
다른 계절의 기억을 품고 있다.
겨울의 침묵,
기울던 방 안의 숨결,
낡은 도시의 새벽,
그리고 그 침묵 위로 피어난 첫 떨림까지.
그 모든 계절을 통과하고,
마지막에야 조용히 피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회복이라 불러도 좋을까.
아니면,
이제야 비로소 살아내기 시작한 것뿐일까.
그날도 바다는 소리를 삼킨 채 펼쳐져 있었다.
밀물은 들어왔고, 모래는 젖어 있었다.
바람은 없었는데, 나뭇잎 하나가 스스로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바라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딘가에선 끊임없이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그날의 침묵이
내 안 어딘가를 조금씩 바꾸고 있었다는 걸,
나는 오래 지나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삶은 종종 무너진 그 자리에서 새로 피어난다.
그러나 그 피어남은 격렬하지도, 극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그것은 극도로 작고 느리고, 조용하다.
사람은 왜 무너지기 전까진 멈추지 못할까.
아니, 어쩌면 멈춘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건 아닐까.
‘괜찮다’는 말로 스스로를 속이고,
‘아직은 버틸 수 있다’는 말로 모든 위험을 유예하며
그저 걷고, 또 걷고,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나 역시 그랬다.
무너지기 직전까지 모든 게 괜찮은 척 살아냈다.
몸은 이미 여러 번 신호를 보냈고,
관계는 조금씩 비틀어졌고,
삶은 분명 어딘가에서 기울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아직은”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끝에 다다랐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토록 원했던 건 쾌락이 아니라 무감각이었다는 것을.
감정을 잠시라도 덮고 싶었고,
머릿속이 고요해지길 바랐다.
숨이 멎어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생각이 아무 방향도 가지 않기를 원했다.
그 시작은 잠깐의 쉼처럼 다가왔지만
어느새 그것 없이는 숨 쉬는 일조차 어려워졌다.
무엇이 회피이고, 무엇이 회복인지조차 흐려졌고
쾌락과 자멸은 종이 한 장의 경계마저 지우고 뒤섞였다.
회복은, 그 모든 뒤엉킴의 끝에서 시작되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무너지지 않으려는 버둥거림마저 멈춘 그 자리에서.
처음에는
하루를 무사히 통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되었고,
어느 날은 사흘을 버텨냈다.
회복은 어떤 계기나 다짐이 아니라,
서서히 물들어오는 빛 같은 것이었다.
어느 날엔 그것이 내게 닿지 않았고,
또 어떤 날엔 그 빛을 모르고 지나쳤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단 한 번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회복이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이미 망가진 것들을
다시 되돌릴 수 있느냐고.
그러나 꽃은
제각각의 계절에 피고,
강물은 얼어붙었다가도
다시 흐른다.
가장 늦게 피는 꽃이 가장 오래 향기를 머금기도 하고,
가장 깊은 어둠 뒤의 새벽이 가장 환하다는 걸
우리는 알고도 자주 잊는다.
나는 돌아왔다.
다만 예전의 나는 아니었다.
예전보다 조금 더 맑아졌고,
더 깊어졌으며,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문득, 이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정말 회복된 걸까, 아니면 다만 더 잘 견디는 법을 배운 것뿐인가.
어쩌면 그것은 같은 말인지도 모르겠다.
견딘다는 것 자체가 회복의 또 다른 이름일 수 있다면.
쾌락과 회피의 경계는
대체 어디서부터 무너졌을까.
나는 이제 그것이
의도가 아니라 감각의 문제였다는 걸 안다.
회피는 스스로를 무심히 덮는 방식이고,
쾌락은 그것을 더 빠르게 밀어붙이는 도구이며,
그 모든 선택은
생각보다 훨씬 은밀히,
삶의 아주 작은 틈에서 시작된다.
그러니 이제는
그 감각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무너지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는다.
대신,
무너졌을 때에도
나를 알아볼 수 있는 기척 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매일을 묵묵히 살아낸다.
어쩌면 인간은
무너지기 전까진 멈추지 못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무너짐이 모든 것을 끝내지는 않는다.
삶은,
무너진 그 자리에서 다시 피기도 하니까.
마치 잊힌 꽃씨가 제때를 만났을 때처럼.
회복은 눈부시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나를 지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날도,
바다는 소리를 삼킨 채
펼쳐져 있었다.
긴 여정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