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2장:해빙

by Grey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시간이었다.
몸은 먼저 깨어 있었고,
나는 말없이 신발을 신었다.
창밖은 짙푸른 어둠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고,
문을 열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천천히 피부에, 목덜미에,
그리고 아주 오래 전의 감정들에까지 스며들었다.

마을은 변함없이 고요했고,
잠들지 않은 새 몇 마리가
먼 하늘 어귀에서 짧은 울음소리를 흘렸.
나는 그 틈을 지나
한 시간 남짓의 출근길에 나섰다.

들판 위로 옅게 내려앉은 안개,
산등성이에 살짝 걸린 빛의 흔적,
검푸른 하늘 아래
어딘가에서 번져오는 붉은빛 한 줄기.

그 풍경 앞에 서자
생각도, 감정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어느 순간, 나는 그 정적 속에서
내가 지나온 시간을,
이제는 내 것이 아닌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에서 숨 가쁘게 달리던 날들,
멈춰 있던 마닐라의 긴 밤.
어딘가에 눌어붙은 채 깨어 있던 침대와
텅 빈 눈으로 마주하던 낯선 얼굴.
무엇인가를 애써 쥐고 있었던 그 손끝은
이제 바닥을 향해 가만히 놓여 있었다.

그때의 나는 떠났고,
그 시간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나는 이제,
그 시간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조금 멀리서.
조금 덜 아프게.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을 건 순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다.
부끄러웠던 나를,
불완전했던 그 시절을.
이해라는 건
언제나 그렇게 늦게 도착하는 법이었다.

흩어졌던 기억들은
서서히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고,
그 아래로 더는 떨어지지 않을 자리는
어느덧 마련되어 있었다.

그건 마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들판 위로 스며들던
그날 아침의 햇빛처럼,
아무 예고도 없이 다가온 것이었다.


그때 문득 깨달은 것이다.
외면하고,
부끄러워했던 시간들이
결국은 지금의 나를
가만히 떠받치고 있었다는 것을.

‘나다움’이라는 말은
어쩌면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부서짐까지도
내가 껴안는 일이었다.

괜찮아졌다는 말은
상처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었다.
흉터는 여전히 남아 있었고,
나는 다만 그 흉터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회복을
무언가 완성된 형태로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내가 만난 회복은
삐뚤고,
무표정하며,
때로는 말 한마디 없는 얼굴로
하루를 버텨낸 흔적처럼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그 하루가 지나간 뒤,
문득,
멀리서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때 나는 조용히 묻는다.
“그때의 너, 괜찮았니.”

그리고 이제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땐 아니었지만,
지금의 나는, 괜찮아.”

그 대답 하나로
내 안에 흩어져 있던 파편들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 자리를 따라
또 하나의 진실이 떠올랐다.
내가 무너졌던 그 시절이
누군가에겐 상처였을지도 모른다는 것.

나는 단 한 번도
완전했던 적이 없었다.
다만 누군가가,
말없이 나의 어설픔을 덮고,
그 자리를 지켜주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미 멀어진 인연은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여전히 가슴 어딘가를 가만히 아려왔다.

그 앞에서,
하나의 다짐이 자라났다.

앞으로 나에게 닿는 사람들에게만큼은
나의 서툼으로
다시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우리는 누구도 완전하지 않다.
실수하고,
때로는 후회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부터
다음은, 다르게 살아낼 수 있다.

어제의 내가 무너졌다고 해서
내일도 그럴 필요는 없다.

출근길의 고요 속에서
붉은 하늘과 푸른 들판 사이를 지나며
나는 조금씩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멀리,
아직 피지 않은 나무의 그림자 아래,
미처 사라지지 않은 빛 하나가
잊혀지지 않은 채
느리게, 그러나 분명히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