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버른에 도착한 첫날, 나는 시티 중심의 오래된 아파트에 짐을 풀었다.
방도, 벽도 없었다.
거실 한켠, 얇은 커튼으로 겨우 구획된 공간.
그곳이 내 ‘방’이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자리였다.
쉐어생들의 발걸음 소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거실을 지나쳤고,
밤이면 부엌 조명이 커튼 너머로 스며들었다.
누군가 내 옆을 지나칠 때면, 얇은 이불이 소리 없이 흔들렸다.
창밖 고층 빌딩의 불빛은 화려하게 반짝였지만,
그 속에서 나는 마치 켜지지 않은 조명처럼, 어둡고 투명한 존재였다.
태어나 처음 겪는 주거 형태 속에서, 나는 또 한 번의 시작을 맞았다.
그리고 그 시작은 다짐이 아닌, 아주 작은 반복에서 비롯되었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눈을 떴다.
물 한 잔에 영양제와 보조제를 삼키고, 이부자리를 조용히 정리했다.
누구에게 보여줄 것도, 누가 알아줄 일도 없었지만,
그 단순한 루틴은 다시 삶을 붙잡은 첫 증거이자,
나 자신과 맺은 가장 성실한 약속이었다.
커튼을 젖히고 발을 내딛으면
이미 도시의 하루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브런치를 즐기며 수다 떠는 사람들,
정장을 입고 바삐 걸어가는 이들.
나는 그 틈에서 그저 묵묵히, 내 몫의 하루를 살아내려 애썼다.
다시 살아간다는 건,
거창한 결심보단 작은 일상의 반복 속에서 시작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않고,
도망치고 싶은 순간에도 조용히 한 발을 내딛는 것.
아직 헤쳐 나가야 할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나는 믿었다.
방향이 맞았다면, 언젠가는 닿게 될 테니까.
그래서 조급해하지 않으려, 스스로를 타일렀다.
하지만 나는 아직 완전히 회복된 사람이 아니었다.
낯선 육체노동에 지쳐 하루 종일 한숨만 내쉬던 날도 있었고,
너무 먼 미래를 바라보다 의지가 무너진 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나는 더 이상 그 과거에 머물고 싶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것이 멈춘 듯했던 날들.
죽음의 문턱에서,
모든 걸 잃고도 살아야 할 이유를
스스로 찾아 헤매야 했던 그 밤들.
그때, 내 안의 조용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무너졌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이 글은 그 목소리의 연장선이며,
나를 다시 붙잡아준 단어들의 집합이다.
나는 과거를 미화하지 않을 것이며,
현재를 과장하지도 않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 그리고 그 회복의 기록.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 모든 시작은,
화려한 빛 너머, 커튼 하나로 구획된 작은 공간에서 비롯되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그 자리에서,
나는 다시 살아가기로 조용히 결심했다.
그렇게 회복은, 낯선 도시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