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2장:계절에서 멀어진 사람

by Grey

햇살이 커튼의 틈을 따라 길게 미끄러졌다.
창밖의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었고,
그 흔들림이 실내에 들어오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오랫동안 천장을 바라보았다.
몸은 깨어 있었지만,
마음은 아직 어딘가에 묻혀 있는 듯했다.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루는 늘 이틀처럼 길었다.
새로운 것들이
매번 다른 무게로 몸에 닿았다.




커튼을 젖히자,
낮은 창턱 위로 빛이 밀려들었다.
손등 위로 닿은 햇살은
이질적일 만큼 부드러웠다.
그것은 그간 잃어버렸던 온기와 닮아 있었다.
버려진 듯한 느낌이 아니라, 이제야 되찾은 감촉이었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몸을 일으켜,
물 한 잔을 마시고,
텅 빈 메모지에 오늘 할 일을 적었다.
마트.
식사 준비.
영어 단어 서너 개.
기억할 수 있다면, 감정한 줄.

문밖으로 발을 내딛을 때,
식탁에 구겨진 영수증이 눈에 걸렸다.
어제 산 크래커.
지난주의 우유.
그건 생존이 아니라,
살아 있으려는 작은 흔적이었다.




마트 안 냉기는 일정한 리듬으로 코끝을 스쳤다.
진열대의 채소들은 늘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나는 매번
새로운 시선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불과 몇 달 전,
무엇을 먹는지 무심했고,
내 몸에 무엇이 들어오는지도 상관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흘러가던 시간이었고,
나는 그 어둠의 일부였다.


지금은 조금 달랐다.
낯선 식재료를 고르는 일은 내게 소소한 모험이 되었다.
한정된 예산 속에서 재료들을 조합하며 내일을 설계하는 감각.
그건 사소하지만, 조금씩 내가 스스로 삶을 설계해 나가는 방법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벤치에 앉아 장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그 안엔 오늘의 하루가 가득 담겨 있었다.
무게는 가벼웠지만,
그 안의 이야기들은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밤이면
공책을 꺼내
오늘의 지출을 적었다.
숫자는 크지 않았고,
글씨도 정갈하지 않았지만,
그 페이지마다
작은 자국이 남았다.
잉크가 마르기 전의 감정 같은 것.

무슨 감정이었을까.
설명할 수 없는 기분들.
어딘가에 닿고 싶지만
말로 꺼낼 수 없는 것들.

나는 그것을 일기로 썼다.
서툰 문장, 끊긴 단어,
그리고 가끔은 아무것도 적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럴 땐
창문을 열어 바깥바람을 맞았다.
불어오는 공기는
내 안의 무언가를 지나
천천히 빠져나갔다.


하루는 그렇게 끝났고,
또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밤이면 균열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화면 속의 사람들은 웃고 있었고,
그들이 찍은 사진들 속
계절은 나와 상관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 계절의 바깥에 있었다.
시간이 나만 멈춘 듯한 착각 속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무심코 뒤돌아본 오래된 사진 속의 얼굴은
언젠가 잃어버린 나와 닮아 있었다.

그 시절,
웃고, 사랑하고, 누군가의 손을 잡으며
미래를 상상하기도 했었던
나는
얼마 전까지 그 손을 놓았었고,
그 미래를 지워 내리고 있었다.

왜 그토록 무너졌을까.
그 질문은 밤마다 찾아왔지만, 늘 대답하지 못했다.
답을 찾으려 애썼지만, 답은 없었다.
대신 남은 건 굳건히 버텨야 한다는 응시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신
작은 약속들을 반복했다.
일기를 쓰고,
가계부를 만들고,
텅 빈 마음 위에 단어를 올렸다.

그건 회복이 아니었다.
회복이라는 단어조차
이 시점의 나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그건
침묵의 생존이었고,
다시 무너지지 않기 위한 묵음의 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