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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감정의 자리

by Grey Hoo

고요하다는 건 감정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State

오늘은 어제보다 평온했다.

감정의 파도는 없었지만,

고요함 안쪽 어딘가에서 잔물결처럼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Thought

나는 한 번도 나를 ‘고요한 사람’이라 말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감정이 크고, 파도가 세게 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가장 살아 있다고 느꼈던 순간은 아무 말도 없고, 아무 소리도 없던 시간들이었다.



직장에서는 많이들 그렇듯-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다. 시키는 일, 통제받는 구조 속에서 내 감정은 자리를 잃었다. 사람들은 나를 발랄하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그건 아마도 내가 외부 세계에 반응하려고 만들어낸 ‘살기 위한 표정’일 것이다. 실제로 내 안은 조용하고, 에너지를 쉽게 소모하지 않으며, 말보다 감각으로 오래 반응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고요할 때 감정이 더 정교하게 작동했다.

내 호흡만 들리던 공간, 손끝만 움직이던 긴 시간,

그 안에서 나눈 침묵의 언어들.

그건 단순히 조용한 환경이 아니라, 자극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살아나는 감각들이었다.


고요함은 내게 감정을 덜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방식이었다.


Note

사실 나는 이미 많은 시도를 해봤다.

브런치 글도 꾸준히 올리고 있고, 감정 회복이 필요할 땐 전시나 도서관 같은 공간을 찾아다닌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태는 무언가를 ‘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를 ‘해온 사람’의 지점이다.


지금 내 마음속에 있는 막막함은 행동의 부족이 아니라, 구조 자체의 고갈에서 오는 것 같다.

더 이상 감정을 비우는 방식으로는 살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이 구조 속에서는, 감정이 작동할 수조차 없다.


그 고요함을 조금 회복해보려는 작은 구조를 바꾸기로 했다.

우선 회사에 가기 전 1시간을, 온전히 내 감정이 깨어나는 시간으로 써보려 한다.

아침에 한 시간 일찍 움직여야 하지만, 퇴근 후 4시간만으로는 내게 부족하다.

감정이 살아날 수 있는 리듬을 만들고, 무표정한 일상 속에서도, 내 감정의 속도로 숨 쉬어보려 한다.

이건 멈춤이 아니라 전환이다.
감정을 버티는 방식에서, 감정을 살아내는 방식으로.

나는 고요한 사람이었던 걸까?
아니면, 감정을 감추기 위해 조용한 무감각 속에 숨어버린 걸까?

나는 안다. 나는 나를 안다.

고요함은 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공간이다.

그것만으로도, 오늘은 조금 살아 있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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