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78

10월의 열흘, 그리고 복귀의 하루

by Grey Hoo

10월 3일부터 쉬었으니, 꼭 10일 만이다.
10일이라는 시간이면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낼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렇게 거창한 사람은 아니다.

명절이 시작되어 부모님 댁으로 내려갔다.
넷플릭스를 보고,
아빠 생신엔 가족끼리 식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동생과 방콕 여행 숙소를 고르느라 시간을 쓰고,비가 자주 내려 동네 커피숍 한 번 나갔다.

나머지 시간에는 여유있는 시간들을 보냈다.

8일에는 유일하게 날씨가 좋았는데 그날만큼은 동생과 우리가 좋아하는 동네 중 하나인 안국역으로 향했다.

그날은 근처를 돌아다니며 전시를 열 개쯤 봤다.

설치미술, 미디어아트, 고려·조선 유물,

그리고 1900년대 초 외국인의 시선 속에 담긴 한국 미술까지.

작가님에게 직접 설명을 들을 수 있었던 전시도 있었고,

온종일 감성으로 가득 찬 하루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우리가 사랑하는 일월카츠에 들렀다.
그곳 사장님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세상에서 ‘센스’ 하나만으로는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손님이 항상 많지만, 필요한 걸 말하기도 전에 척척 챙겨주시고,
항상 웃으며 손님을 맞이한다.
그의 눈치는 세상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맛은 말할 것도 없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벼르고 벼르던 옷방 정리를 시작했다. 의류 쪽 일을 하며, 그동안 하나둘 쌓인 샘플이 정말 많았다. 시즌이 바뀔 때마다 모인 옷들이 어느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되어버렸다. 지인에게 주거나 중고로 팔 수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품이 너무 많이 들어 이번엔 전부 기부하기로 했다.
결국 100벌 가까운 옷을 정리해 기부 단체에 보낼 준비를 했다.
간단히 썼지만, 사실 이건 거의 2일에 걸친 대형 프로젝트였다.
방정리를 하다 보니 자잘한 물건들은 바구니에 담아두어야 할 것 같아서 다이소에서 바구니와 정리함을 몇 개 사왔다.

그 안에 이것저것 넣어두니, 방이 한결 깔끔해 보였다.
그렇게 10월 9일, 휴일의 마지막 날 밤이 되어서야 모든 정리가 끝났다.

그리고 오늘, 오랜만에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남들도 이 정도로 힘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오늘 정말 너무 힘들었다.
일이 많은 것도 아닌데,
단지 ‘다시 이곳에 왔다’는 사실때문인가.

6월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고민들이
10월이 된 지금도 여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내년 상반기에는 퇴사의 의사를 밝히고,
봄에 나오는 것이 목표지만,
그 이후의 삶은 아직 확실하지 않아 막막하다.

길게 보면 대단할 것 없는 열흘이지만,

나에게는 꼭 필요했고 소중했고
나름의 리듬과 감정이 다 있었다.


‘쉬는 시간’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나를 다시 정리하고 비워내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걸,
그리고 그 비움을 다시 채워야 할 때가
이렇게 낯설 수도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어제 써둔 글이지만 하루늦게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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