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의뢰의 어려움
미술을 전공한 친한 동생에게 책표지에 들어갈 일러스트를 의뢰했었다.
"책을 하나 만들건데 표지에 들어갈 일러스트가 필요해. 대충 이 사진을 레퍼런스 이미지의 느낌으로 그려줬으면 좋겠어. 비용은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괜찮을지 모르겠다.
의뢰서를 통해 나름 명료하게 의사 전달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작업자는 그러지 않은 모양이다.
사진의 인물은 어디까지 노출되야 하나요?
배경을 그려야 하는지 구도는 그대로인지 바꿔도 되는지 알려주세요.
샘플 사진 해상도가 큰 사진은 못구하는지, 뼈를 어느정도 디테일하게 그려야 하나요?
채색퀄리티는 더 평면적으로 가도 되는지, 컬러 음영 대비는 어느정도로 해야하나요?
제목은 어떤식으로 들어가는지, 인물을 어느정도까지 사실적으로 그려야 하나요?
사이즈가 작아지면 인물의 이목구비도 잘 드러나지 않을텐데 괜찮나요?
그 외에도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를 당황하게 했다. 그리고 보내준 제안서가 충분했다고 여긴 내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다.
전문 기획자는 아니지만 디자인을 하며 기획파트의 일을 할 때가 있다. 주로 클라이언트를 만나 그들의 요구사항을 듣는 일인데 대부분의 클라이언트가 자신이 원하는 요구사항을 구체적으로 전달하지 않아 답답한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나서 만들어 놓으면 새로운 말이 나온다. 정의서에 없던 내용들이 그제서야 추가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처음엔 화가 아주 많이 났었는데 나중에는 이 방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 저들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는 모르는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측은한 마음을 가졌었다. 그런데 나라고 다르진 않았다. 머리속에 그려진 그림을 대충 던져주면 이 친구는 미술하는 친구니 알아서 캐치해서 만들어 줄 것이란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민망했던 부분은 미술을 했으니깐 레퍼런스의 풍으로 그리는건 쉽게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 것이다. 이건 마치 웹디자이너에게 로고 디자인이나 편집디자인 해보라고 시키는 거랑 비슷하다. 붓을 만질 줄 아니 붓으로 할 수 있는건 다 할 수 있을거란 착각. 나중에 들었지만 레퍼런스에 그린 풍으로 그리는건 불가능한건 아니지만 시간과 에너지가 엄청나게 소요된다고 한다. 저런 스타일로 줄곳 작업했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경험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끼며 대화를 이어갔다. 이런 안일한 내 모습에 짜증보다 의연한 모습으로 대처한 동생덕분에 문제를 파악하고 좋은 방향으로 선회할 수 있었다. 동생도 이런 비슷한 사례가 많았다보다. 마치 내가 예전 클라이언트를 볼 때같은 마음으로 나를 서포트하고 있었다.
카톡에서 전화로, 그리고 다시 줌으로 옮겨가며 서로의 생각을 맞춰나갔다. 핀터레스트를 통해 시각화되어 있는 다양한 일러스트를 참고삼아 내가 하고자 했는 방향을 동생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사실 지금도 조금 혼란스러운건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정한 후 알려주면 뭔가 창의성의 영향을 주는 것 같고 또 너무 의뢰하는 쪽에서 에너지가 많이 들어 힘들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간단하게만 알려주면 작업자가 막연함의 늪에 빠질 것 같다. 대체 어느정도 선에 맞춰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고민이다. 하지만 중요한건 우리가 서로의 생각을 잘 모른다는 전제하에 자유로운 대화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화와 토론, 이미 완성된 다양한 레퍼런스를 통해 커뮤니케이션 하며 그 간극을 줄여나가야한다. 이 부분을 귀찮아해서도 두려워해서도 안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