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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y수 May 21. 2024

첫사랑 추억을 남편과 함께하다.

7시까지 갈게


아이들 저녁을 서둘러 차려주고 남편과의 약속시간에 맞춰 출발한다. 사실 퇴근하고 와서 너무 지치고 아이들 밥까지 급하게 차려야 하고, 저녁에 오늘까지 들어야 할 온라인 강의가 떡하니 있지만 남편에게 그 시간까지 가겠다고 말했다. 


7시에 만나 설레는 대학축제에 남편과 함께 들어섰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봄바람은 아직도 설렌다. 누가 봐도 학부모 같은 우리 모습이 물 위에 기름처럼 겉도는게, 집 나간 아이 찾으러 온 엄마라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 내 옷차림을 훑어 본다. 24년 전에 나는 이런 공기 속에서 동아리 주점을 열어서 열심히 제육볶음과 파전을 만들었었다. 생전 요리도 안 해본 나였지만, 주점 베스트 메뉴를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와 돈을 많이 벌어 동아리 회비를 든든하게 채워 넣겠다는 목표에 애써 안주를 만들어 냈지만, 호응은 내 기억에만 좋게 남았으리라. 지금도 못 만드는 제육볶음을 그때는 무슨 재주로 만들었을까. 


F인 남편은 좋은 날씨를 그냥 못 넘긴다. 아까워하며 그 날씨 속에서 즐겨보고 싶어 한다. 지금을 즐기며 사는 전형적인 F이다. 나는 내일을 위해 살아가는 T이기에, 지금 날씨가 중요하지 않다. 당장 쨍한 날씨에 모자가 있는지가 중요하고, 내일 비가 올 것인지가 관심사다. 남편이 날씨가 좋은데 근처 대학교 축제까지 한다며, 함께 가보지 않겠냐고 말을 꺼낸다. 원래 같으면 고민도 없이 'NO'라고 했었을 텐데, 오늘은 그리 대답하기 미안했다. 남편과 함께 대학교 축제를 구경하며 주점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대학교 주점이 우리 때랑 달라진 게 몇 가지 있었다. 우선 축제에 있는 여자 대학생들과 또래로 보이는 여자들이 매우 매력적으로 꾸미고 온다. 내가 대학생 때는 힙합 바지에 헐렁한 티를 입고 많이 꾸미면 좀 쑥스러워서 그리 못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 학교 축제를 돌면서 보니 아줌마스러운 표현으로 아이돌 같이 꾸민 여자 대학생들이 가득해서 신기할 따름이다. 또 다른 점은 외부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K대학교의 특징인지 요즘 다 그런지 모르겠지만 두 번의 입장 거부를 같은 이유로 당했다. 해당과 학생만 주점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순간 나이 많은 우리를 입장거부하는 핑계인가 보다 싶어 얼른 달아나고 싶었다. 다행스럽게 딱 한 군데  '외부인 입장 가능'이라고 쓰여있는 안내장을 보며 다른 곳은 안 되는 게 맞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마음 구석에 아직도 우리를 입장거부 하기 위한 좋은 핑계였다는 의구심을 굳이 지워버리지 않았다.


 마음을 깔끔하게 비우고 학교 후문 식당으로 향했다. 15년 전에 이 학교 출신 입사동기가 소개해준 맛집으로 남편을 데리고 골목 깊이 들어갔다. 내 기억력이 이리 좋았던가. 골목 안에 분위기와 메뉴도 동일했고 우린 야외 테이블에 모두 먹는 메뉴를 자연스럽게 시키고 앉았다. 


학교 뒷골목, 깨끗하지 않지만 저녁 공기 속에서 소주 한잔을 할 수 있는 그곳은 나에게 타임머신 같았다. 앞에 앉아있는 남자가 남편이라는 사실을 점점 까먹고 추억 속으로 홀라당 빠져버렸다. 첫사랑과 만났던 그곳이 여기와 비슷했었고, 도서관도 함께 다니며 시험공부도 했고, 집에서 돈을 전혀 보태주지 않아서 아르바이트만 6개씩 하던 친구라 내가 밥도 사주고 많이 챙겼었다는 미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궁금해하지는 않지만 잘 끄덕이는 남편을 보며 결국은 그 첫사랑이 양다리를 걸쳐 헤어지게 되었다는 웅장한 결말까지 깔깔거리며 혼자 지껄였다. 

달디단 소주 한잔을 탓하리라. 

네가 이리 달지 않았다면 내가 헛소리를 잔뜩 입에 물지 않았을 텐데. 계란말이 네가 이리 맛나지 않았다면 내가 정신 차리고 남편 표정에 귀 기울였을 텐데. 낙지제육볶음이 달짝지근 매콤하지 않았어도 마음속 자물쇠를 풀지 않았을 텐데. 수습하려니 내가 말이 더 길어지기 시작했다. 주워 담으려 해도 애초에 담길 덩어리들이 아니다. 남편이 그냥 어이없이 웃는다. 


사실 오늘 남편을 위로하려 만나러 나갔던 것이다. 남편이 회사에 힘든 일이 몇 가지 겹쳐서 벅차함이 느껴져서, 오늘은 좀 신경을 써주고 싶었다. 예전 같으면 남편의 힘든 일을 듣고 현실성 떨어지는 해결책을 잔뜩 제시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게 잘못되었는지 남편의 일상과 행동을 지적했을 것이 뻔하다. 얼마 전에 깨달은 것은 남편이 원하는 위로는 그냥 곁에 머물러 주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말로 꼭 집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답을 다 알고 있는 남편에게 해결책을 떠들어 댄들 의미가 없고, 그냥 옆에 머물러 주며 별일 아닌냥 함께 웃어 주는 것에 남편은 충전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힘들 때 가만히 나를 두는 것이 가장 원하는 위로이다 보니, 남편이 원하는 위로법까지 다가오기는 15년이 넘게 걸렸다.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남편 위로법으로 오늘 남편을 만나러 간 것인데, 헛소리도 그런 헛소리를 남편 앞에서 한 것이다. 


네가 그런 감정 스펙트럼이 있어서 다행이다. 


항상 극단적이고, 감정은 없애고 판단을 앞세우는 나에게 남편은 다행이라 말해 준다. 바람피운 첫사랑 때문에 죽도록 아팠고, 그 사랑을 놓아주는 것도 사랑이라 배웠고 그 아픔은 지금도 마음이 아린다는 말에 오랜 친구처럼 남편이 다행이라 말해준다. 어릴 때 경험해서 다행이고, 그게 우리가 아니라 다행이고. 


위로해 준답시고 남편 옆에서 머물려했던 나는, 얼마나 그를 위로해 준지는 모르겠다. 남편은 짧은 첫사랑보다 백배 천배 나와 함께 한 티를 내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괜찮다고 해준다. 시간이 관계에 부린 마법이라 할까 보다. 미래의 시간까지도 무턱대고 믿는 마음이라 할까 보다. 내일 또 위로는커녕 화나고 불만이 쌓일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이리 멀쩡해 보인다. 멀쩡한 하루하루를 또 든든함이라 말해 본다. 


당신이 내 첫사랑이 아니라 다행이고, 
넓은 감정스펙트럼 중간에 단단히 자리 잡아줘서 다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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